캐나다 퀘백 주 몬트리올 외곽 라셀의 한 스포츠 단지에 마련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동병원에서 26일(현지시간) 한 적십자 요원이 걸어가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캐나다 퀘백 주 몬트리올 외곽 라셀의 한 스포츠 단지에 마련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동병원에서 26일(현지시간) 한 적십자 요원이 걸어가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뉴스퀘스트=성우제(캐나다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캐나다에 건너온 한국 사람들이 가장 먼저, 공통적으로 맞닥뜨리는 불편함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느림보 문화이다.

모든 것이 빨리빨리 돌아가는 한국에 비하면 캐나다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느릿느릿이다. 관공서에 가면 속 터지고 지하철은 느린데다가 툭 하면 고장이다. 승객 수십 명이 탄 버스를 길가에 세워두고 운전기사가 커피를 사러가는 광경을 목격한 적도 있다.

이런 느린 문화 때문에 답답해하고 놀라워했는데 살다보니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느림보 문화 이면에 꼭 빨리 해야 할 일은 한국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문화가 존재한다.

특히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일 처리는 너무도 빨라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나는 캐나다의 이 같은 ‘빨리빨리’ 문화를 이민 초기에 한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천하태평 느림보 문화가 보편화한 사회에서, 꼭 필요하고 긴급한 일이라면 전광석화처럼 해치우는 캐나다 특유의 방식을 나는 요즘 십수 년 만에 다시 경험하는 중이다. 코로나19 비상사태에 캐나다 연방정부의 긴급 지원 대책을 통해서이다.

캐나다뿐만 아니라 서구의 모든 나라들이 발생 초기에 코로나19를 얕잡아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올해 초 2개월 동안 중국에서 폭발한 사태를 보면서도 북미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전염병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공항에서도 입국자 검사를 까다롭게 하지 않자 중국과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안해하며 스스로 자가 격리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3월초까지만 해도 마스크를 끼고 돌아다니면 오히려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할 정도였다.

3월11일 세계보건기구(WHO)가 글로벌 팬데믹을 선언한 이후 상황은 돌변했다. 잠재해 있던 확진자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사망자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한국 인구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사망자 수가 벌써 한국의 4배에 이른다.

비록 방심과 오판은 대참사를 불러왔으나 이후 비상시국에서는 캐나다 특유의 속전속결 ‘빨리빨리 문화’가 빛을 발하는 중이다.

3월 중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연방총리가 “최선을 다해 빨리 지원하겠다.

시민들은 정부를 믿고 안심하시라"라고 발표할 때만 해도 선언적인 의미가 큰 줄 알았다.

그러나 약국과 식품점 같은 꼭 필요한 가게만 문을 열게 하고 5명 이상 만나는 것도 금지한 록다운이 실시된 지 2주 만에 연방정부는 CERB(한국으로 치면 ‘긴급재난기금’)를 신청하라고 했다. 신청 자격과 방법은 간단명료했다.

먼저 자격. 작년 한 해 동안 5천 캐나다달러(약 440만원) 이상의 근로소득자 가운데 글로벌 팬데믹 선언 이후 2주 동안 수입이 없는 사람(나중에는 한 달 수입 1000달러 이하 파트타이머들까지 포함시켰다).

신청 방법은 놀라울 정도로 쉽고 간편했다. 전화나 온라인으로 한국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번호(SIN)와 출생연도만 입력하면 사흘 안에 은행계좌에 한 달치 2000달러(약 180만원)를 입금해 주었다.

이 같은 지원은 4개월에 걸쳐 이루어진다. 코로나19 사태가 앞으로 몇 달 지속된다면 자격자는 총 8000달러를 지원받는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지 불과 2주 만에 시스템을 만들고 지원한다는 것은 준비기간이 짧았던 만큼이나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 지원을 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캐나다 연방정부는 숨넘어가는 사람들을 우선 구제하고 본다. 그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는 차후에 느릿느릿, 그러나 반드시 수습하고 바로 잡아나간다.

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청을 했다고 하는데,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자격을 다시 심사하고 조정해 나갈 것이다.

팬데믹 선언 2주 만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소상공인과 취약계층의 숨통부터 틔워준 이후 캐나다 연방정부가 각종 정책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 마치 ‘지원의 예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영업자에 대한 4만 달러 무이자 융자(2년 후 3만 달러만 갚으면 된다), 아르바이트를 못한다는 이유로 대학생들에게 3개월에 걸쳐 총 3700달러 지원, 자영업자 가게 임대료 75% 지원에 이어 최근에는 두 달째 모임을 갖지 못한 종교단체에 대한 지원책까지 내놓았다.

세금과 각종 공과금 납부는 몇 달 뒤로 연기해 주었고, 주택 은행대출 자금을 갚아나가는 것도 6개월 뒤로 미뤄주었다.

말하자면 전 국민이 이 어려운 시기를 통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장치를 마련해 연일 발표하는 중이다.

물론 홈리스 등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더욱 어려워진 사각지대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전대미문의 큰 불행 속에서도 빨리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진 이 같은 지원정책은 경제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안도감을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아무리 큰 위기가 닥친다 해도 내가 속한 공동체는 내 고통을 알아주고 나를 지켜준다는 믿음, 이것만큼 사람을 안정시키는 것도 드물다.

가게 문을 닫은 채 한 달 보름 가까이 이른바 ‘집콕' 생활을 하는 나 같은 자영업자에게는 일시적으로나마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히 큰 위안이 된다.

시민들이 안도감을 갖는다는 것은 정치인과 공무원 같은 공직자들이 고민하고 숨 가쁘게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우제(캐나다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성우제(캐나다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그들이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딱 그만큼 시민들은 편한 삶을 누린다.

방역 부문에서 세계의 찬사를 받고 있는 한국에서, 돈을 쌓아두고도 긴급재난기금을 아직까지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 기이하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빨리빨리 DNA’를 가진 민족인데도 말이다.

숨넘어가는 국민들을 지원하는 일을 두고 일부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발목을 잡는다는 것은, 그들이 국민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 정치세력의 수장이 탄핵을 당하고 최근 총선에서는 참패를 당했는데도 그들은 요지부동이다. 악마의 무리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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