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부근의 수요집회 벽화. [사진=연합뉴스]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부근의 수요집회 벽화. [사진=연합뉴스]

【뉴스퀘스트=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머무는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토론토 집콕 루틴’이 생겼다.

하루 일정 가운데 하나는 아침식사를 하며 한국의 MBC 뉴스데스크 시청하기.

최근 뉴스 아이템 2개가 연달아 보도되는 일이 잦았다. 코로나19의 새로운 전파지로 지목된 코인노래방과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파문.

두 사안이 딱히 연관성은 없으나 2주가 넘도록 뉴스에서 함께 보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노래부르기’와 ‘기부’ 문화의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80년대 초 대학생이 되어 드나들기 시작한 학교 앞 술집에서 신기한 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술집의 모든 탁자들은 쇠 테두리를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술을 마시며 우리는 노래를 불렀고 쇠젓가락으로 탁자를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날이면 날마다 쇠젓가락으로 두들겨대니, 나무 탁자가 남아날 리가 없었다. 술집 주인들은 쇠 테두리를 둘러 탁자를 지켰다.

술집 노래부르기 문화는 직장에 들어가도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노래를 부르려고 술자리를 만드는 것 같았다. 우리는 노래부르기에 걸신 들린 것처럼 행동했다.

90년대 노래방이 등장하면서 그 문화는 급변했고, 몇 년 전부터는 많아봐야 서너 명이 즐기는 코인노래방으로까지 나아갔다고 했다. 30년이 흐르는 동안 젓가락장단이 코인노래방으로 진화한 셈이다.

그런데 뉴스데스크에서 코인노래방에 이어 나오는 정의연을 보면 시민운동단체의 문화가 세상 변화에 비교적 둔감했던 게 아닌가, 그래서 문제가 더 커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번 일을 두고 여당 지지자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정의연의 해명에 아쉬움을 넘어 불신을 표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랬다.

코로나19에 대한 방역으로 새삼 확인된 사실이기도 하거니와, 캐나다 사는 내가 보기에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 같다.

서양에서 100년 걸린 경제성장을 불과 20~30년 만에 해냈다고 해서, 과거 한국은 압축 성장에 성공한 나라라고 불렸다. 예전에는 압축 성장이었다면 2000년대 20년은 초압축 성장을 이뤄낸 시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은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문에서 20세기와는 비교 불가한 성장과 변화를 만들어냈고, 가장 후지다는 정치 쪽에서도 시민들은 유례가 없는 무혈혁명을 성공시켰다.

과거 압축 성장으로 인한 큰 그늘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초압축 성장 시대에도 사회적 갈등이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정의연 논란의 큰 축 가운데 하나는 초압축 성장에 따르는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데서 연유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보기에, 이용수 할머니의 문제제기로 불거진 정의연 논란은 대략 세 가지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첫째는 이용수 할머니와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의 갈등. 이 갈래에서 회계문제는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둘째는, 회계문제를 크게 부각시켜 흠집을 만들려는 보수언론과 수구세력의 정치공세. 이들은 가짜뉴스 생산도 서슴지 않는다.

세번째 갈래는 윤미향 전 이사장을 비롯한 정의연 관계자들이 잇달아 해명을 하는데도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젊은 시민들의 기류이다. 코인노래방과 정의연 뉴스의 연관성은 바로 세 번째 갈래에 해당된다.

전쟁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시절부터 정의연이 규명하고 쌓아온 빛나는 성과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의연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무려 30년 동안이나 꾸준히 활동을 해왔다.

그럼에도 정의연 논란이 이렇게까지 번지는 것은 보수언론과 수구세력의 정치공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의연의 구태의연한 회계 관련 운영방식에 실망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 보니, 2000년대 들어 한국이 발전한 것만큼이나 NGO 활동에 대한 젊은 세대의 생각과 관심도 많이 바뀌었다. 말하자면 NGO나 자선단체에 대한 기부행위가 생활 속에 뿌리내린 선진 서구사회 문화가 한국의 젊은 세대에도 자리를 잡은 것이다. ‘만원의 연대’ 같은 조직적인 기부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SNS에서도 기부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 페이스북 친구인 어느 40대는 10개 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한다고 했다. 월급쟁이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친구'는 후원하는 단체를 늘 꼼꼼하게 따져본다.

옛날처럼 단체가 내세우는 대의만 따지는 게 아니다. 내 지갑에서 나가는 돈이 투명하게 집행되는가, 그 투명성을 내가 쉽게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기부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대의와 선의를 믿고 일종의 부채감 때문에 주로 기부하던 과거와는 다른 문화이다. 시민운동의 선의에 새로운 요구사항이 하나 붙었으니 바로 투명성이다.

NGO가 새로운 기부자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갈등이 따르고 운동의 동력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회계 투명성이 ‘NGO의 마케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의연의 회계문제와 관련해, 정의연 관계자들도 인정한 부분은 ‘오류'와 ‘누락'이다. ‘부정'은 아니라 해도 2000년대 초압축 성장 이후의 젊은 세대에게는 ‘오류’ ‘누락' 또한 지갑을 닫게 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또 한 가지는 NGO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옳고 당연시되던 일의 진행 방식이 지금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자기희생에 관한 것. 윤미향 전 이사장 아버지가 박봉에 안성 쉼터 관리인으로 일한 것을 두고 과거와 오늘의 시각은 엇갈린다.

옛날식이라면 아름다운 일로 평가되겠으나 요즘 시각으로는 주먹구구식 일처리로 비판 받기도 한다.

활동가 개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과거에는 큰 덕목으로 여겨졌을지 몰라도, 지금은 재능기부조차 비판 받는 세상이다. 더구나 사람을 ‘갈아넣는' 방식은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다 한들 더이상 환영 받을 일이 못된다.

젊은 여당 지지자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번 사안을 두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본질적인 이유는, 정의연의 회계방식이 여전히 과거 문화에 묶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계 전문가를 고용할 수 없다는 열악한 환경은 더이상 핑계가 되지 못한다.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던 시대에는 대의명분과 진정성만 있으면 모든 것이 통했다. 평범한 개인들은 헌신적인 활동가들에게 부채감을 가졌고 시민사회운동은 그것을 동력으로 삼았다.

2020년대인 오늘, 기부문화를 기반으로 시민사회운동을 펼치는 선진 서구사회의 어느 단체도 시민들의 부채의식에 기대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부가 일을 못하면 선거로 바꿔버리듯이 NGO가 ‘오류'나 ‘누락'을 저지른 기미만 보여도 지원을 끊어버린다.

어쩌면 투명성은 NGO의 활동 자체만큼이나 중요할 일일 수도 있겠다.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고 열심히 활동한다 해도, 회계가 흐리면 시민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NGO 활동이 활발한 사회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언제든 열람할 수 있게끔 NGO 회계 내역을 공개한다.

캐나다 언론들은 NGO 리스트를 100개, 1000개씩 따로 만들어 회계 및 활동 내역을 해마다 기록(책으로 묶어 판매한다)하고, 심지어 CEO 연봉 순위를 작성해 공개한다.

이런 시스템을 알고 이런 문화에 익숙한 코인노래방 시대 기부자들이 회계의 ‘누락'이나 ‘오류'에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이번 논란이 다른 갈래에서는 어떻게 전개되든 간에, 이참에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꼭 필요하고 반드시 지속되어야 할 운동이라면, 아무리 힘겹고 어렵더라도 시대에 걸맞는 투명한 운영방식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대의 주력은 젓가락장단이 아니라 코인노래방 세대이다. 주력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운동의 뜻이 아무리 높고 뚜렷해도 외면 받고 쇠락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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