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위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정의 없이 평화 없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6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위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정의 없이 평화 없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뉴스퀘스트=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20여년 전 캐나다에 살러오자마자 영어학교에 등록을 했다.

새로 온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무료로 가르치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프로그램이었다. 한 반 정원은 30명 정도. 쉬는 시간이면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모여서 정착에 필요한 정보를 나누곤 했다.

우리 반에는 나를 포함해 한국 사람이 4명 있었다. 통성명을 하고 “언제 왔느냐"와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지금 사는 지역에 대해서도 서로 궁금해했다. 한 사람이 “나는 OO에 산다"고 하자 나머지 세 사람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똑같이 물었다. “거기 괜찮아요?”

‘괜찮냐’는 질문은 곧 ‘위험하지 않느냐’ ‘시끄럽지 않느냐' ‘더럽지 않느냐' 등의 뜻을 담고 있었다. OO은 주로 흑인들이 사는 동네라는 사실을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도 많았으나 “가서는 안 된다"라고 콕 집어 지목된 곳은 OO뿐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당연하다는 듯 “흑인 동네면 왜 안 되는데?”라고 반문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선입견과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평범한 한국 사람들은 교류조차 해보지 않았으면서도 흑인들이 사는 동네를 ‘위험하다' ‘거칠다' ‘가난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OO에 산다던 한국 사람의 말이 퍽 인상적이었다. “싼 곳을 급하게 찾다보니 내 형편에 맞는 곳이 그 지역 임대 아파트밖에 없었다. 나도 처음에는 걱정을 좀 했었다. 그래서 딱 1년만 살자고 생각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위험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았다. 이웃들은 순박하고 착하다. 월세가 싸서 당분간 계속 살 생각이다.”

그 동네에 사는 이가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는데도 세 사람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보내려고 그러느냐” “그래도 빨리 나오는 게 좋지 않겠나”. 서울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서울 사는 사람보다 서울을 훨씬 더 잘 안다는 식이었다.

그 영어학교에서 공부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그 동네에 가서 살지 않았고, 살 생각도 없었으며, 혹시 그 동네를 지나갈 일이 있으면 조금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 지역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국 사람들을 통해 이런 소식은 가끔 들었다.

“장사는 잘 되는데 좀도둑이 있다.” 좀도둑은 그 동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지역에도 많은데도 그 소리를 들으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다.

토론토는 100개가 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인만큼 인종 전시장이라고 할 만하다. 캐나다 사람 5명 가운데 1명은 외국 태생이니 이곳 사회에서는 인종차별을 중범죄로 여겨 법으로 엄하게 다스린다.

학교에서는 피부색깔이나 출신지, 성 정체성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친다. 차별이 추악한 범죄라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확고하게 심어주지 않으면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아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곳에서 그런 교육을 받은 이민자 자녀세대가 아니라, 영어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우리 같은 이민 1세들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한국을 포함한 동양계 이민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흑인 사회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유색인종이기는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캐나다에서 처음 집을 구할 때 가장 선호하는 지역은 백인 동네였다. 우리도 이민자면서 이민자가 적은 동네를 좋은 지역으로 꼽았다. 반대로 흑인 동네는 가지 말아야 할 곳, 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유색인종이자 소수민족이라 해도 아시아 사람들은 백인들의 이웃이 될 수 있는 ‘좋은 마이너리티'라 스스로 여기며 살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좋은 마이너리티' 혹은 ‘모델 마이너리티'라는 개념은 우리가 아닌 백인 주류사회가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기존 시스템에 불평등한 점이 있어도 불만없이 순응한다는 의미로 ‘좋은' ‘모델' 마이너리티라는 뜻인데도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그 말에 은근히 만족해온 편이다.

나아가 상대적으로 ‘나쁜 마이너리티'라 일컬어지는 흑인사회에 대해 우월감을 갖는 경향마저 있다.

주류가 ‘좋은' ‘모델'을 ‘나쁜’ 마이너리티를 비판하는 무기로 사용해도 딱히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같은 마이너리티이면서도 아시아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나쁜 마이너리티’에 대해 편견을 드러내는 것을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코로나19 사태로 북미 동양인들의 이 같은 사고방식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위험한 것인가 하는 사실이 곧바로 증명되었다.

아시아 사람들은 ‘좋은' ‘모델'에서 하루아침에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나쁜’ 마이너리티로 손가락질 당하기도 했다. 다양한 민족이 조화롭게 모여산다는 토론토와 뉴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가 아무런 경험도 근거도 없이 흑인지역을 기피했듯이, 평소 우리를 ‘좋은' ‘모델’ 마이너리티라 치켜세우곤 했던 사람들 또한 우리를 향해 근거 없는 혐오감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 사람들을 비롯한 동양인들은 흑인에 대한 편견을 무심결에 드러내는 경향이 없지 않다. 단지 덩치가 크고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무섭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린다.

동양인들의 편견은 일부 백인 못지않게 견고하다.

영화 <겟아웃>을 보면, 자기 스스로를 리버럴리스트라 여기는 백인은 흑인 청년을 보고 무심코 말한다. “(흑인이라) 운동 잘 하겠구나.” 이런 생각은 백인들만 하는 게 아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이나 기분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런 차별 발언은 우리 언어생활 속에 녹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흑형'이다. 백형은 없고 황형도 당연히 없다.

문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처럼 되어버린 우리의 이런 말과 태도가 최근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살해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미국 경찰 데릭 쇼빈이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잔혹하게 짓눌렀을 때, 그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게 하고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지속하게 한 힘은 경찰 한 사람의 것만은 아니었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흑인을 차별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말, 눈길과 표정 하나 하나가 모이고 모여 백인 경찰의 무릎에 힘을 가하도록 만들었다고 해야 맞다.

단지 미국 경찰 몇 사람들만의 죄라면 그들만 처벌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미국을 넘어 세계 각처로 끊임없이 퍼져나간다. 그것은 미국의 주류 백인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단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다.

한국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피부색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피부색 다른 한국인’의 비율은 앞으로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이참에 우리도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의 ‘다른 한국인’을 차별하지는 않는지 심각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그런 반성이 없다면 플로이드 살해사건과 같은 비극이 한국 사회를 강타하는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 수밖에 없다.

북미에서는 지금 ‘좋은 마이너리티'라며 믿고 살아온 동양 사람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민 2세들 사이에서 높아지는 중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대학 3학년인 내 딸은 남아공의 성공회 대주교 데즈먼드 투투의 말을 끄집어냈다.

“불의를 눈앞에 두고도 중립을 지킨다는 핑계로 침묵한다면 그것은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의 편을 드는 것이다. 코끼리가 쥐의 꼬리를 밟았는데, 중립을 지킨다고 가만히 있는다면 쥐가 과연 고마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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