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묻혀 있던 모차르트의 미발표곡이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손끝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지난 1월 27일 모차르트의 생일을 기념하여 그의 고향에 있는 모차르테움(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연구기관)에서 일어난 일이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내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모차르트는 35년의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여행을 하면서 유럽 곳곳에 600여 곡 이상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중 생전에 발표되어 정확하게 기록된 작품은 아주 일부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여행지에 흩어져 있던 그의 악보를 찾아서 모으고 연대순으로 정리한 인물은 음악연구가 쾨헬(Ludwig von Kochel, 1800-1871)이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작품번호 앞에는 반드시 쾨헬번호(K 또는 KV)라는 것이 붙는다.

19세기가 시작되던 해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70여 년을 살다간 쾨헬은 젊은 시절에는 자연 탐사에 몰두했던 식물학자이자 광물학자였다.

탐사에서 거둔 자신의 채집품에 정확한 날짜를 기록하고 종류별로 분류하여 채집번호를 달았듯이 그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탐사하여 출판 연도를 추정하고 장르별로 분류하여 작품번호를 부여했다.

도처에 흩어져 있던 모차르트의 작품은 쾨헬에 의해 K1부터 K626까지 단정하게 정리되어 1862년에 목록집으로 출판되었다.

이는 당시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획기적인 음악사 연구였다.

식물학자로 살았던 젊은 시절의 습관이 노년의 그가 음악사에 큰 업적을 남기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전 세대의 원본 악보를 찾아 작품번호를 붙이고 악보를 해석하고 작곡 의도를 복원하는 일련의 과정은 식물분류학의 일과 놀랍도록 닮았다.

이를테면 전 세계의 식물표본관을 뒤져서 먼 과거에 채집된 어느 식물학자의 식물표본을 찾아내어 채집번호와 친필서명을 확인한 후 탐사경로를 복원하고 그때의 식물목록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버드대학교 아놀드수목원 표본관에 소장된 표본 한 장. 1909년 8월 어느 날 제주도에서 채집된 폭나무 표본이다. 1898년 조선에 도착해 50여 년을 카톨릭 선교와 조선의 식물 연구로 살다간 에밀타케 신부의 채집품이다. 그의 손글씨로 적힌 채집번호 3213을 표본의 오른쪽 하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하버드대학교 아놀드수목원 표본관]

쾨헬보다 더 깊이 식물탐사에 몰두했던 인물로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 1781~1838)가 있다.

그는 낭만파 작곡가들의 음악에 큰 영향을 준 독일 시인이다.

샤미소의 시에 곡을 붙여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낭만주의의 정수로도 불리는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를 탄생시켰다.

프랑스 특유의 희극을 창시한 음악가로 인정받는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는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에 샤미소의 작품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에피소드처럼 등장시킨다.

작곡가들이 선택한 샤미소의 시와 소설도 좋지만, 나는 그가 식물학자로서 탐사선에 올라 기록한 기행문(A voyage around the world with the Romanzov exploring expedition)을 가장 좋아한다.

1836년에 출판된 그 탐험기는 세계적으로 기행문학의 고전처럼 여겨지는데, 내게는 마치 살아있는 식물탐사 학습서 같다. 

1815년 러시아 백작 루미안체프(Nikolay Rumyantsev)의 지원으로 꾸려진 과학 탐험선 ‘루리크(Rurik) 호’에 샤미소는 러시아 국기를 달고 식물학자로서 몸을 싣는다.

미지의 땅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식물을 채집하고 그의 이름을 건 신종을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원정은 남미의 최남단 케이프 혼과 태평양의 하와이를 거쳐 베링해를 통과하는 3년에 걸친 대항해였다.

탐험선이 처음 발견한 알래스카의 코체부 사운드(Kotzebue Sound) 지역의 샤미소섬(Chamisso Island)은 항해를 이끈 선장의 이름 코체부(Otto von Kotzebue)와 샤미소라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탐사를 통해 샤미소는 약 1,000여 종의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여 기록하였다.

그는 약 2,500종의 식물을 수집하였다고 원정대의 첫 보고서에 기록하였는데, 그중 절반 이상은 정확한 종의 정보가 밝혀지지 않은 채 그의 채집상자에 보관되어 지금도 식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샤미소는 하와이 제도의 토착식물을 연구한 최초의 식물학자 중 한 사람이다.

하와이에서 샤미소가 발견하여 기록한 낯선 섬 식물은 후대에 이르러서야 그 종의 정확한 실체가 밝혀지기도 했다.

발견 당시 그가 커피의 일종일 것이라 기록한 하와이의 토착식물 2종은 식물학자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다.

생김새의 차이를 따져 구분하는 종의 경계에는 한계가 있었다.

20세기 후반에 DNA 염기서열을 비교하는 연구 기법이 도입되면서 이들에 대한 종의 실체도 선명해졌다.

커피(Coffea)와는 서로 다른 유전자 배열을 지닌 사이코트리아(Psychotria) 속(屬)의 식물이라는 것.

동물로 따지면 삵과 고양이의 관계나 침팬지와 오랑우탄의 관계처럼 이들은 생김새는 커피와 유사하지만 서로 다른 계통의 식물이라는 것이다.

샤미소가 발견한 하와이 토착식물 ‘사이코트리아’는 야생커피로도 불린다.

1817년 하와이에 도착한 샤미소가 발견한 야생커피의 일종 사이코트리아(Psychotria mariniana). 당시 그는 이 낯선 하와이의 토착식물이 커피의 한 종류일 거라 생각하고 그 이름을 기록했다. 후대에 이르러서야 이 식물의 정확한 실체가 밝혀졌다. [사진=세계생물다양성정보기구 홈페이지]

새로운 종을 기록할 때는 반드시 그 증거표본이 제시되어야 한다.

탐사에서 식물학자들이 채집에 열을 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샤미소가 야생커피 2종을 기록할 당시 그가 채집한 증거표본은 탐험선이 회귀한 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표본관에 보관되었다.

샤미소가 발표한 신종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좀처럼 이견이 정리되지 않은 채 후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그 증거표본은 유럽의 각국을 오가며 여러 식물학자들의 손을 거치게 된다.

그러던 중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증거표본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사라졌다.

전쟁과 화재에 대비하여 식물학자들은 식물표본을 채집할 때 두어 점 더 넉넉하게 채집하여 그 중복표본을 만든다.

다행히도 샤미소는 개인 채집상자에 야생커피 2종의 중복표본을 남겨두었던 것. 그 사실은 불과 몇 년 전에 확인되었다. 

흩어져 있던 샤미소의 채집품을 모으고 정리하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자연사박물관의 표본실의 식물학자 버거박사(Andreas Berger)가 1817년에 샤미소가 채집한 그 증거표본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그는 샤미소의 채집번호와 채집행적과 탐사기록을 추적하여 증거표본이 진품이라는 결과를 2018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그것은 샤미소가 남긴 채집표본이 마침내 발견되었기에, 그가 또박또박 기록한 채집일기가 안전하게 보존되었기에, 일찍이 그의 기행문이 출간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샤미소, 그는 프랑스 혁명으로 독일에 망명한 이방인이었다.

자신의 식물학적 연구 성과가 좋지 않던 시기에 극도로 불안을 느꼈던 그는 자기 안의 내면을 묘사한 소설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를 쓴다.

소설은 발표와 함께 호평을 받으며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번역되기도 했다.

그 힘으로 식물학자 샤미소는 루리크 탐험선에 오른 것이다.

3년의 항해를 끝내고 그는 커다란 채집상자를 전리품처럼 들고 귀국한다.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 분야의 명예박사 학위를 얻고 곧장 베를린 식물원의 학예사로 임명되어 그는 식물표본실에서 식물학자로 자신의 연구를 이어간다.

탐험에서 익힌 하와이 원주민 언어를 바탕으로 민속학에 관심을 두기도 했고, 작가로서 인기와 명성도 얻었다.

방황 속에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오지를 탐험하고 제 자리에 돌아와서야 자신을 마주하고 마침내 삶의 안식을 얻은 것처럼.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초연으로 세상에 알려진 모차르트의 미발표곡에는 ‘K626b/16’이라는 번호가 붙었다.

쾨헬번호 기준으로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K626번 ‘레퀴엠’을 잇는 번호다.

그가 남긴 42개의 스케치를 묶어 K626b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16번째 곡이라는 것.

작곡가는 떠난 지 오래고 악보만 남은 그 곡은 젊은 연주자의 손끝에서 아름답게 되살아났다.

경쾌한 음의 흐름은 입춘 무렵 도도록도도록 부푸는 키버들 꽃눈 같다.

우리 할아버지가 키버들 가지를 나란히 겹쳐서 엮은 키를 쓰고 나는 옆집 할머니 댁에 소금을 얻으러 간 적이 있다.

악몽을 꾸고 난 이른 아침이었다.

그 일이 지금은 아주 오래된 문화처럼 여겨진다.

흔히 버들강아지라고도 부르는 물가의 갯버들과 닮았지만 키버들은 털이 없이 매끈하고 잎이 가지런히 마주난다.

빨갛게 겨울을 견디던 키버들 꽃눈이 입춘을 지나자 경쾌한 운율처럼 도도록하게 부풀고 있다. 키버들은 키를 짜거나 바구니를 만들 때 널리 쓰인 우리 전통식물이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그날의 연주 영상을 돌려보며 나는 채집번호 2307번이 손글씨로 적힌 1915년 8월의 식물표본을 확인한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를 휘젓고 다니며 식물 연구를 한 나카이(Takenoshin Nakai)의 채집품 중 북한에서 수집되어 그의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 한 식물의 증거표본이다.

이를 근거로 나카이는 1930년에 검팽나무라는 이름의 조선 토착식물의 존재를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 생김새와 사는 환경이 풍게나무와 너무 비슷해서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한 채 한 세기가 훌쩍 흘렀다. 

샤미소가 남긴 증거표본을 후대의 식물학자들이 골똘히 연구하였듯이 100여 년 전 그날에 채집된 이 한 장의 표본에서 탄생한 식물의 실체를 나는 촘촘히 추적하는 중이다.

갓 얻은 그들의 DNA 분석 결과도 나의 길에 힘을 실어 준다.

검팽나무와 풍게나무 사이의 거리를 재단하는 이 일로부터 머지않아 꽃눈같이 해사한 선율이 번져 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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