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등재를 위한 제언

해양수산부(장관, 문성혁)는 지난 3월 8일 ‘울진·울릉 떼배 채취어업’이 국가중요어업유산에 등재되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뉴스퀘스트는 국가중요어업유산이 무엇인지, 그 현황이 어떤지 또 울진·울릉의 떼배 채취어업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김남일 전 경북환동해안본부장의 기고문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미역짬이 즐비한 경북 울진 나곡해안.
미역짬이 즐비한 경북 울진 나곡해안.

국가어업유산 및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유네스코(UNESCO)는 인류의 유산을 발굴 및 보호, 보존하고자 인류의 문화유산을 그 특성에 따라 자연유산, 문화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하여 지정한다.

그것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고 한다.

한편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2002년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과는 다른 세계중요농업유산제도(GIAHS)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전통적 농업, 어업, 축산업, 임업 등에서 인류의 지혜와 역사가 담긴 유산을 보호, 유지하자는 목적으로 개설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임업과 축산업을 포함한 중요농업유산을 보호, 유지, 관리하기 위해 농림축산식품부가 국가중요농업유산제도를, 해양수산부가 국가중요어업유산제도를 각각 관장한다.

2021년 2월 현재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15종의 국가중요농업유산을 지정하였고, 이 중 4종은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되었다.

해양수산부는 2021년 3월 현재 9종의 국가중요어업유산을 지정하였다.

국가중요농업유산에 경상북도는 울진군의 ‘울진 금강송 산지농업’, 울릉군의 ‘울릉 화산섬 밭농업’, 의성군의 ‘의성 전통수리 농업시스템’, ‘상주 전통곶감’ 등 4종을 포진시키고 있다.

국가중요어업유산에는 울진·울릉 떼배 채취어업이 2021년 3월 등재되었다.

경상북도에서도 역사시대 이전부터 어업활동을 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경상북도에는 미역 채취의 전통과 미역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상북도 미역 어업의 특징은 떼배 채취어업이기에 이름하여 ‘돌곽 떼배 채취어업’이라고 명명했다.

이 ‘돌곽 떼배 채취어업’이야말로 국가중요어업유산이라고 아니할 수 없으며 또한 제주의 해녀어업 등과 함께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도 지정될 수 있다.

해녀와 미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글은 경상북도의 울진군과 울릉군의 ‘돌곽 떼배 채취어업’의 역사, 유래, 전개 등을 살펴보며, 나아가 전통 미역 어업의 미래 산업적 가치를 점검하며, 한편으로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등재를 위한 제언을 담을 것이다.

한반도 미역 문화의 태동(胎動)

미역건조작업(울진)
미역건조작업(울진)

경상북도에 면한 동해의 총연장은 537km나 된다.

또한 경북 동해는 동해의 가장 중요한 섬이자 중심인 울릉도와 독도를 행정 구역으로 포함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에 경북 동해는 문무대왕과 이사부 장군을 비롯해 많은 신라인들이 활약했던 바다이다.

또한 경북 동해는 귀신고래와 독도 강치가 삶의 터전을 삶고 살고 뛰어놀았던 곳이다. 이처럼 경북 동해는 해양 생태계의 보고이자 한민족의 해양 DNA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이러한 경북 동해안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대구와 경북의 새로운 해양지향적 발전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해안 나름의 독특한 해양문화의 정체성을 찾아내 이를 ‘동해 헤리티지(Heritage)’로 체계화하여 기록·보존·전승하는 동해학(東海學)을 정립하는 일이다.

더불어 이를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여 과학화, 산업화, 국제화함으로써 청년이 찾아오는 동해, 전통어업의 문화산업과 첨단 해양 신산업이 함께 고루 발전하는 동해로 발전시키겠다는 전략적 사고가 절실하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미역 문화다. 미역은 단순한 먹을거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미역 혹은 미역 문화에 체계적인 산업화 과정 및 국제적인 마케팅을 입혀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동해를 고래의 바다, 경해(鯨海)라고 불렀다.

5000년 이전부터 고래를 잡아 삶의 터전을 이루었다. 반구대암각화가 바로 살아있는 생생한 근거다.

반구대암각화는 우리 조상이 인류 최초로 고래잡이를 해서 살았던 것을 그림으로 보여 준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미역을 먹었다.

아이를 낳고 처음 이레 동안 미역국을 먹는 독특한 음식문화가 있었다.

산모(産母)가 섭취한 다량의 미역은 젖을 통해 아이에게 그대로 전해졌으니, 우리 민족은 태어나자마자 미역을 먹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미역을 먹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 이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우리 말 ‘물’을 ‘매(買)’라고 한자로 표현했고 미역을 땅에서 자라는 ‘여뀌’라는 풀과 비슷하다고 해서 ‘매여뀌’라고 불렀다.

‘매여뀌’에서 ‘ㄲ’ 아래 모음이 탈락하면 ‘매역’이 되고 ‘매역’에서 모음변이가 일어나 오늘날 ‘미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름 단순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물여뀌 → 매여뀌 → 매역 → 미역

또한 고구려에 미역의 명칭이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 시대 이전부터 우리 민족이 미역을 먹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개 명칭은 동식물이나 행위에 대한 인식 이후에 생기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 발간된 일종의 백과사전인 『초학기(初學記)』에 “고래가 새끼를 낳은 뒤 미역을 뜯어 먹은 뒤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고려 사람들이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는 것도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산모가 미역을 먹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려도경』에도 예로부터 동해안 북부를 주산지로 하는 양질의 해조류(미역과 다시마)가 중국으로 보내는 주요 품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어염세와 선박세와 함께 곽암(미역바위)에 세금을 부과하는 곽전세(藿錢稅)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지금도 울산시 북구 강동동 판지마을의 해안 바닷속 ‘곽암(藿巖, 미역이 붙어서 자라는 바위)’은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북도에 유래하는 미역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 편에 나온다. “신라 서기 157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미역)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바위가 나타나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삼국유사』에서 연오가 따던 해초 부분 원문은 ‘一日延烏歸海採藻(일일연오귀해채조)’이다. ‘海採藻(해채조)’는 연오랑세오녀 설화의 현장이라고 추정되는 포항시 동해면 임곡리의 바닷가 정황과 설화 속의 상황으로 보아 미역으로 특정할 수 있다.

아울러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 등에 울진 나곡리의 고포미역을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와 함께 울진 나곡리와 울릉 천부리, 죽암리 현포리 등에서는 현재도 떼배 채취어업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짬고사와 올미역 채취, 짬매기 활동 등 떼배를 이용하여 곽암(미역바위)에서 돌미역을 공동 생산, 공동 가공, 공동 배분하는 전통 어촌마을의 공동체 문화가 지금까지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다음회에 계속)

/김남일(전 경북환동해지역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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