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국립국악원]
[사진=국립국악원]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국립국악원은 조선시대 장악원의 후신이라고 해도 좋다.

조선 초기 장악서와 악학도감의 전통을 전승한 장악원은 1470년(성종 1) 이후 1897년 교방사로 개칭될 때까지 427년 동안 공식적으로 사용된 국립음악기관의 명칭이었다.

장악원의 책임자는 장악원 제조(提調)로 종 1품, 정 2품, 종 2품 사이의 문신이 겸하는데 장악원의 업무를 총괄했다. 요즘으로 보면 장관급이 장악원의 최고 책임자였다.

음률로 다스림은 조선의 통치 이념 중의 하나였기에 조선은 음악을 매우 중요시했다. 장악원은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회례악 등 조선 정부의 각종 행사의 음악을주관했다.

장악원에 소속된 음악인은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경국대전을 기준으로 하면 약 1천여 명이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500여 명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음악인이 국가 공식 음악원에 종사했던 것이다.

이 장악원은 1895년 궁내부의 장례원으로, 1897년 명칭이 교방사로 바뀌면서 인원이 축소되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것은 일본군에 의해 장악원이 쑥대밭이 된 일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1905년 경성에 들어와 악공과 악사를 쫒아내고 장악원 건물을 무단으로 점령했다. 당시 장악원 건물은 지금의 을지로 롯데호텔 부근이었다.

교방사는 1907년에는 장악과(掌樂課)로 경술국치 직후에는 아악대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아악대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개칭되어 8·15 해방을 맞이했다.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개칭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0년 1월 18일 대통령령으로 국립국악원의 직제가 공포되고, 1951년 4월 10일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으로 개원했다.

국립국악원의 예술과 행정을 책임지는 역대 국립국악원장은 다음 표와 같다.

역대국립국악원장 출신학교 및 기간.
역대국립국악원장 출신학교 및 기간.

위 표을 보면 국립국악원 초창기에는 이왕직아악부에서 개설했던 아악부원양성소 출신의 이주환, 성경린, 김기수 원장이 거의 30년을 국립국악원 원장직을 수행하면서 국립국악원의 기초를 다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후 송방송 4대 원장부터 서울대 국악과 출신 원장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1995년 제 10대 이성천 원장 이후 2021년 2월 임기가 만료된 임재원 원장까지 국립국악원 원장은 서울대 국악과 출신이 독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국악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하여 국악을 공부한 사람이 엘리트 국악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인 물이 썩는다는 아주 단순한 속담에서 보는 것처럼 한 기관의 장을 한 학교 출신이 독점하면 그 폐해는 나타날 수밖에 없다.

독점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

인맥과 학맥으로 둘러싸인 조직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점은 언젠가는 불거지게 마련이다.

벌써 국악계에서는 국립국악원 정악단 단원 모집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가 탈락한 것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나온다.

하응백 문화에디터.
하응백 문화에디터.

그러한 의혹은 물론, 예술 평가의 주관성에 따라 발생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장의 한 학맥의 장기 독점은 그런 의혹을 비롯한 여러 잡음에 대해 원천적으로 당당할 수 없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한 기관의 기관장을 25년 동안 한 대학의 특정 학과가 독점하고 있는 이런 기관이 대한민국에 또 있는가?

이는 국립국악원을 관리 감독하는 문체부(장관 황희)에서 심각하게 인식하여야 할 문제다. 학연과 지연, 특히 특정 학연 철폐는 시대적 사명이다. 공정이 강조되는 시대에 어찌 국립국악원에는 구태의연이 지속되고 있는가? 어찌 문체부에만 공정의 바람이 불지 않는지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문체부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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