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일이 어려워진 시절이다.

다시 모여 살기 위해 인류는 지금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집단면역을 기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식물들도 아주 오랜 과거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며 지구에서 생존해 왔다. 각자의 자리에서 모이거나 흩어지길 반복하면서 말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없고 오직 한반도에만 모여 사는 ‘모데미풀’이라는 식물이 있다.

일본인 식물학자 오휘(Jisaburo Ohwi)가 1935년에 지리산 운봉 모데기마을에서 처음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진 식물이다. 

모데미풀. 1935년 지리산 운봉 모데기마을에서 처음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우리나라의 고유식물이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북쪽으로 운봉읍을 잇는 길과 남쪽으로 지리산 달궁계곡을 잇는 길이 모이는 모데기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1구간의 중간쯤에 있다.

억새로 이은 초가지붕을 만날 수 있는 남원의 주천면 덕치리의 모데기마을은 한자식 이름 표기에 따라 지금은 회덕(會德)마을로 불린다.

새로운 식물을 처음 발견할 당시의 지명을 받아 적어서 모데미풀이라 이름 지었던 것인데, 옛 지명이 사라진 것처럼 어쩐 일인지 지금은 그 마을에 살던 모데미풀도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과거에는 보다 널리 자랐을 것이라 추측하나 지금은 일부 특정한 환경에서만 살아남은 식물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선택한 특수한 땅을 가리켜 식물학계에서는 ‘피난처(refugia)’라고 말한다.

어떤 환경 변화에 맞서 식물들 스스로가 생존이 가능한 곳으로 떠나거나 모여서 형성된 터전이라는 의미다.

아니, 그 땅만이 아직은 식물을 죽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재난을 피해 더 먼 곳으로 터전을 옮겨야만 했던 이들처럼.

지금 모데미풀은 소백산과 태백산, 덕유산과 한라산 등 인간의 생활권과 아주 멀리 떨어진 높은 산에만 생존해 있다.

세계자연보전연맹은 모데미풀을 국제적인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하였다.

한반도에서 사라지면 지구에서 영영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낼 것을 강조하면서.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모데미풀의 분포도. 모데미풀은 국제적인 멸종위기종이다. [사진=세계생물다양성정보기구]

자연을 똑같이 모방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모데미풀을 만나며 더욱 긍정하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1000m가 훨씬 넘는 높은 산지 중에서도 깊은 계곡을 품고 있는 산을 모데미풀은 신중하게 선별한다.

그렇게 엄선한 산에 들어 500고지가 넘어가는 지점의 사람 발길 닿지 않는 계곡 쪽을 다시금 고르고 골라서 마침내 뿌리를 내린다.

4월에도 그곳에 잔설이 머무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모데미풀은 융설의 시간을 셈하며 싹을 내고 꽃을 피운다.

그러니까 청명도 한식도 한참이나 지나고 곡우 즈음해서 산중의 계곡에도 일조량이 늘어 볕은 차츰 더 따뜻해지는데, 그럴지라도 해빙은 더디게 진행되어 잔설과 온기가 오묘하게 공존하는 그 역설적인 자리에 삶터를 이루는 거다. 

모데미풀을 살리기 위하여 그들이 사는 환경을 고스란히 구현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대체 서식지를 조성하기 어려운 멸종위기종은 자생지를 반드시 지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모데미풀이 살 수 있는 곳을 샅샅이 뒤지듯이 추적한다.

멸종위기종의 서식지 탐사연구는 자생지를 안전하게 보전하는 것이 그들을 살리는 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리는 일종의 구호작전이다.

000산 모데미풀 생존 확인! 대체 서식지 조성이 어려운 국제멸종위기종! 자생지 보전 필수! 개발과 남획 등에 대비한 사전 보전 대책 수립 철저! 등을 나는 다소 준엄한 어조로 연구보고서에 꾹꾹 눌러쓴다.

4월 중순부터 5월 초순 사이에 피는 모데미풀 꽃은 정말, 정말이지 예쁘다.

만개한 꽃은 내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한 송이 한 송이가 별 모양이다.

포기를 이루며 무더기로 모여 나면 마치 하늘의 별들이 후두두 쏟아져 내려 반짝반짝 땅에 박힌 것 같다.

그래서 모여 핀다는 뜻의 모데기풀이 모데미풀이 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 적도 있다. 

포기를 이루며 무더기로 모여 피는 모데미풀. 꽃잎처럼 보이는 하얀 꽃받침잎은 생존을 위한 위장술이다. 다양한 곤충이 모데미풀의 꿀샘을 찾아온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꽃잎처럼 보이는 다섯 장의 하얀 꽃받침잎은 생존을 위한 모데미풀의 위장술이다.

꽃잎인지 꽃받침인지 경계 없이 오직 씨앗이 될 밑씨를 안전하게 지키겠다는 연대가 만들어 낸 생존전략.

이를 식물학 용어로 ‘화피(꽃덮이)’라고 한다.

이 꽃덮이는 5장이거나 6장인데, 좌우 그리고 대각선 어디에서 접어 보아도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하게 대칭이다.

이를 방사대칭이라고 한다. 하늘을 나는 곤충들의 눈에 쉽게 들기 위해 치장을 한 것이다.

꽃덮이 안쪽에는 곤봉 모양의 노란색 꿀샘이 10여 개 남짓 모여서 암술과 수술을 에워싼다.

모데미풀 한 개체가 개화하는 동안에 방문하는 곤충은 10여 종이 넘는다.

꽃파리류와 애꽃벌류가 주된 수분매개자다. 개화 초기의 비교적 이른 시기에는 모데미풀의 새하얀 꽃덮이에 이끌려 파리류가, 개화가 한창 진행되어 꿀이 농익을 무렵에는 벌류가 주 방문객이다. 꽃의 방사대칭에, 또는 꿀 냄새에 사로잡혀 찾아온 곤충은 꽃가루를 묻힌 채 모데미풀의 이 꽃 저 꽃을 옮겨 다니며 이전 방문지의 꽃가루를 다른 개체의 암술머리에 묻힌다.

다양한 전술을 발휘하여 모데미풀은 계획한 타가수분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근친교배에 비해 타가교배가 더 건강한 자손을 생산한다는 것을 모데미풀은 인간보다 훨씬 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여름 식물들이 땅을 초록으로 덮기 전에 모데미풀은 서둘러 제 몸을 허물고 영근 씨앗을 떨구어 다시금 흙으로 돌아간다.

일찍이 땅속에 들어 다음 해를 준비하는 것이 모데미풀의 생활사다. 

꽃 진 자리에 맺힌 모데미풀의 열매. 여름 식물이 무성히 자라기 전에 모데미풀은 서둘러 씨앗을 땅속으로 떨구며 다음 해를 준비한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세월호 참사 7주기에 나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걸친 어느 산에 갔다.

조용히 묵도를 올리는 마음을 모데미풀 곁에서 나누고 싶었다.

2014년을 전후로 몇 해간 모데미풀의 서식지 환경에 대한 모니터링 조사를 했던 장소가 그 산에 있었다.

산은 정상부에 천문대가 있어서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일찍부터 나 있었다. 오가는 차가 늘면 늘수록 수척해지는 모습에 걱정이 많던 참이었다.

더 나은 차량 통행을 위해 몇 해 전에는 길 확장 공사를 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도착한 날은 그들 자리가 완벽하게 사라졌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들의 터전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곰곰 반추했고 한순간에 얼마나 쉽게 모데미풀을 잃을 수 있는지를 말없이 반성했다.

그러고도 한동안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들이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기를, 재난을 피해 또 다른 거처에 성공했기를, 재회라는 희망을 마음속 깊이 빌고 또 빌면서.

잔설처럼 쌓여 있는 당신,
그래도 드문드문 마른 땅 있어
나는 이렇게 발 디디고 삽니다
폭설이 잦아드는 이 둔덕 어딘가에
무사한 게 있을 것 같아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서               
- 나희덕 「편지4」 부분

IPCC(기후변동에 대한 정부 간 패널)는 고산지역의 연 평균 기온이 전 지구적 평균 기온 보다 급격하게 상승하는 추세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특히 고산지역의 기온은 20세기를 전후하여 북반구 고위도 보다 2배나 높은 상승률을 보였으며, 북반구 고위도의 적설 면적은 21세기 말까지 최대 25%까지 감소할 수 있다고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이러한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고산식물은 백두대간의 더 높은 산정으로 자꾸만 대피하고 있다. 모데미풀이 지구상에서 버텨낼 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와도 같다.

 “잔설”이 머무는 “둔덕 어딘가에” “드문드문” “무사한 게 있을 것 같아” 나는 오늘도 백두대간을 따라 그들의 생존을 좇는다. 재앙과 고난에도 살아남은 꽃들이 자욱한 별처럼 피고 지는 그 피난의 땅을.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