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가을에 한반도 남도의 제철 과일은 뭐니 뭐니 해도 무화과가 아닐까 싶다.

이 무렵 신안 장산도에서 목포를 지나 부산까지 이어지는 국도 2호선에는 그 근방에서 수확된 무화과를 파는 노점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특히 영암군은 국내 최대 무화과 산지로 유명하다.

최근 온난해진 기후는 국내의 무화과 재배지를 충북까지 끌어올렸다. 

무화과나무는 서양에서 아주 먼 과거부터 재배한 지중해 원산의 유실수다.

우리 땅을 비롯하여 동양에는 무화과와 형제 뻘인 ‘천선과나무’가 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를 잘 알지만 토종 무화과라고 할 수 있는 천선과나무는 잘 모른다. 

무화과는 성경에 수차례 등장하면서 신성한 과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천선과는 하늘의 신선이 먹는 과일이라는 뜻인데 열매의 크기와 식물의 체구가 작은 편이라 중국에서는 ‘작은천선과(矮小天仙果)’라고 부른다. 

8월의 천선과나무.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8월의 천선과나무.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1988년부터 1991까지 경남 창원의 다호리 고분 발굴 당시 천선과로 추정되는 열매가 나와서 고고학계와 식물학계가 머리를 맞댄 적이 있었다.

출토된 열매만으로 단정하기는 조심스러우나 무화과나무 재배종이 국내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인, 원삼국시대의 고분이라는 점에서 일찍이 우리 문화는 천선과를 식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 후에 이스라엘 요르단 계곡의 신석기 집터에서 말린 무화과가 발견되어 국제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은 사건이 있었다.

연대를 측정해보니 자그마치 11,400년 된 것으로 그 이전에 가장 오래된 작물로 여겼던 밀이나 보리보다 1,0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야생의 무화과를 딴 것일지도 모르는데 심어 기르는 ‘작물’이라고 추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야생의 것이라면 생식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발견된 무화과의 씨앗을 분석한 결과 오늘날 재배하는 무화과처럼 생식 능력이 없다는 근거 때문이었다.

그렇다. 국내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재배되는 무화과는 대부분이 육종된 암그루이고 탐스러운 열매만 맺을 뿐 안타깝게도 자손을 생산하지 못한다. 

하지만 야생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지중해 연안에서 저절로 자라는 야생 무화과는 번식에 성공하기 위하여 조금 특별한 생존 전략을 택했다.

소나무처럼 암수한그루도 아니고, 버드나무처럼 암수딴그루도 아니고, ‘기능적암수딴그루’라는 특이한 번식 방법을 취한 거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처럼 특별한 무화과의 생식 체계를 확인할 길이 없다.

한반도에는 야생의 무화과나무가 단 한그루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우리 땅에는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천선과나무가 있다. 

무화과나무와 무화과나무좀벌의 생활사. 무화과나무의 ‘기능적수그루’ 꽃 내부에서 태어난 수컷은 암컷과 교미한 후 이내 그 꽃 안에서 죽고 새끼를 밴 암컷은 잉태한 꽃에서 나와 다른 꽃에 가서 산란한다. 그 과정에서 나무의 꽃가루받이를 돕는다. 지구상의 대표적인 공생관계다. 천선과나무도 이와 같다. [사진=sayostudio]

천선과나무는 무화과나무와 마찬가지로 열매를 맺고 번식에 성공하기 위하여 앞서 말한 ‘기능적암수딴그루’라는 생존 전략을 택했다.

이는 열매를 맺을 암꽃만 피는 ‘암그루’ 따로, 수꽃과 불임의 암꽃이 한 그루에 피는 ‘기능적수그루’ 따로 생존하는 생식 체계를 말한다.

수꽃은 꽃가루를 만들며 제 역할을 다 해내지만 암꽃은 형태만 갖출 뿐 생식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능적수그루’라는 말을 쓴다.

이러한 설명이 다소 복잡해서 ‘기능적수그루’를 그냥 ‘수그루’라 표현하고 무화과를 ‘암수딴그루’라고 설명하는 일반 자료가 대다수다.

하지만 식물학자들은 이러한‘기능적암수딴그루’를 천선과나무가 종족 번식에 앞서기 위해 ‘암수딴그루’로부터 진화한 방식이라고 엄밀히 구분해서 본다. 

특히 천선과나무가 생존과 번식을 위해 고안한 방법은 무화과나무와 마찬가지로 아주 정교하다.

하나는 수천만 년 전에 이룩한 곤충과의 공생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생존 방식이다.

전자는 천선과나무의 ‘암그루’와 ‘기능적수그루’가 아주 가까이 살면서 수분 매개 곤충인 ‘천선과좀벌’의 도움으로 열매를 맺는, 가장 안전하고 자연스러운 번식 방법이다.

학자들은 이들이 관계를 이어온 시간이 아마도 6000만 년 정도 되었다고 추정한다. 후자는 혼자서 열매를 맺는 놀라운 능력을 말하는데 암그루가 꽃가루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 부리는 묘술 같은 전략이다.

수분매개자가 이끄는 일반적인 번식에 비해 자손을 생산할 확률은 낮지만 생존만을 놓고 본다면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 다 한다고 해서 식물학 용어로 ‘단위결실(單爲結實)’이라고 부른다.

다음 세대를 잇기 위한‘종족번식’보다 극한 환경에서는 현재의 생존을 위한 ‘개체유지’를 택하는 천선과나무의 삶은 어쩐지 현대인의 생존 방식과도 닮았다.

이렇게 혼자서 열매를 맺을 줄 아는 암그루만을 선별하여 기르고 증식하고 품종을 개량한 것이 오늘날 전 세계에 번진 무화과나무 재배법이다. 

천선과(무화과)와 천선과좀벌(무화과좀벌)의 관계는 그야말로 동화 같아서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제법 알려져 있다. 

열매만 있고 꽃은 없다고 해서 무화과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꽃이 보이지 않는 거라 식물학 용어로 은화서(隱花序)라고 한다.

‘천선과’도 이와 똑같다.

꽃을 받치거나 감싸서 밑씨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꽃받침이 꽃을 아예 집어삼키듯이 둘러싸서 과육 형태로 변형되어 열매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 꽃이다.

그 꽃 속에는 ‘천선과좀벌’이라는 작은 곤충이 사는데 꽃 속에서 태어난 수컷은 암컷과 교미한 후 이내 그 꽃 안에서 죽고 새끼를 밴 암컷은 잉태한 꽃에서 나와 다른 꽃으로 가서 산란을 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나무의 꽃가루받이를 돕는다.

이런 내용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이었다.

하지만 꽃의 내부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곳에서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라는지, 정확하게 어느 시기에 꽃가루를 어떻게 옮겨서 열매를 맺게 하는지 등을 또렷하게 기록한 자료는 국내에서 알려진 게 없다.

나는 요 몇 년 동안 숲을 조사하면서 천선과나무 꽃과 열매를 관찰하는 일에 몰두했다.

내가 탐구한 첫 번째 사실은 비교적 많은 암그루가 야생 무화과와 마찬가지로 꽃가루받이 없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얻은 정보는 천선과와 천선과좀벌의 관계는 예상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나의 학위논문 주제였던 팽나무를 찾아다니며 천선과나무가 사는 수많은 자리 또한 알게 되었다.

남도의 바닷가 마을을 좋아하는 팽나무 옆에는 천선과나무가 자주 눈에 띄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천선과나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겉으로 보면 꽃과 열매가 똑같이 생겼고 언뜻 봐서는 암그루인지 아닌지도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저 나무는 늘 대추 같은 걸 몸에 달고 있네, 꽃 아니면 열매겠지, 하고 무심코 지나가곤 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팽나무의 면면을 포착하고 기록하는 데 더 집중해야 했으니까. 

암그루(왼쪽)와 기능적수그루(오른쪽)가 겨울을 나는 모습.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자료로 사진 속 실제 나무는 무화과나무다. [사진=hal-02516888]

활엽수들이 잎을 다 떨어뜨리는 겨울에 팽나무는 나목이 되어 더욱 근사해진다.

잎도 열매도 모조리 벗어젖힌 팽나무 옆에서 천선과나무는 두 가지 모습으로 겨울을 난다.

대추처럼 생긴 열매 모양의 꽃을 달고 있는 ‘기능적수그루’와 꽃을 달고 있지 않은 ‘암그루’.

암그루는 가을에 씨앗을 이미 다 퍼뜨린 뒤의 모습이었고, ‘기능적수그루’는 꽃 안에 지난여름에 암컷 천선과좀벌이 산란한 알을 품고 겨울을 나고 있었다.

책에서 배우지 못했던 정보를 현장에서 실제로 만났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암그루’는 홑몸으로, ‘기능적수그루’는 알을 품은 대추 모양의 꽃을 단 채 겨울을 난다는 것, 그래서 꽃을 잘라보지 않고도 천선과나무의 ‘암그루’와 ‘기능적수그루’를 구분할 수 있는 적기는 겨울이라는 것, 천선과나무와 천선과좀벌의 공생관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겨울을 기점으로 관찰을 계획해야 한다는 것!

기능적수그루의 꽃(왼쪽)과 암그루의 꽃(오른쪽).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천선과나무에서 꽃을 달고 월동하는 건 ‘기능적수그루’다.

이른 봄에 월동한 꽃을 잘라서 보면 절반은 수꽃이고 절반은 암꽃이다.

수꽃은 장차 꽃가루를 생산하며 꽃의 본분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암꽃은 앞서 말했듯이 열매 될 생각이 추호도 없는 불임이다.

밑씨를 품어야 할 씨방이 ‘천선과좀벌’의 알을 품도록 짜여 있기 때문이다.

이른 봄에 관찰한 꽃의 내부에는 전년 여름에 다른 꽃에서 잉태한 암컷이 들어와 낳은 알이 빼곡하게 차 있다.

꽃은 알을 품은 채 봉긋해져서 오월이면 먹음직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잘라서 꽃의 내부를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열매로 착각하기 쉽다.

천선과 맛이 형편없다는 평가는 아마도 이 무렵에 알이 꽉 찬 꽃을 열매로 잘못 알고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천선과좀벌 암컷(왼쪽)과 수컷(오른쪽).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봄 다 지나고 여름 올 무렵에 알들이 부화한다.

알에서 먼저 나오는 건 수컷이다.

이름 때문에 ‘벌’과 같은 형상을 상상했는데 크기는 내 몸에 돋는 자잘한 사마귀 정도 되고 모습은 탈피하고 떠난 매미의 허물처럼 생겼다.

이들 수컷은 겨우내 자신을 품어준 그 꽃에서 태어나 암컷이 부화하기를 기다렸다가 암컷과 교미한 후 오래지 않아 그 꽃 안에서 죽는다.

날아다닐 필요가 없으니 날개가 없는 거였다.

천선과나무의 꽃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작은 생명체를 들여다보다 나는 가슴 한 쪽이 아릿해졌다.

수컷 천선과좀벌을 관찰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다른 곤충도 만날 수 있다.

천선과나무의 ‘기능적수그루’ 꽃 에는 천선과좀벌뿐만 아니라 그들에 기생하는 ‘천선과좀벌기생벌’도 산다.

그 종류는 곤충학계에서 지금도 하나둘 밝히는 중이다.

나는 한 달 전에 천선과나무 꽃들 사이에서 낯선 기생벌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곤충을 전공하는 가까운 선배에게 그 종류를 알아봐달라고 문의해 놓았다.

여름이 무르익을 때 ‘기능적수그루’ 꽃의 내부는 수컷의 활동이 암컷의 부화를 이끌기 때문에 매우 소란스럽다.

암컷은 날개도 있고 수컷보다 크고 정말 ‘좀벌’같이 생겼다.

몸 크기는 2mm 정도 된다. 잉태한 암컷이 산란하려면 태어난 꽃을 탈출해서 다른 꽃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이 드나들 입구를 생각하면 암컷의 체구가 큰 편이다.

천선과나무 꽃의 정수리 부근에 참외 배꼽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온 자리가 암컷의 나들목이다.

그 모양이 인상적이라 어떤 지방에서는 천선과나무를 젖꼭지나무라고도 부른다.

암컷이 탈출해야 할 때가 되면 그 볼록한 자리가 약간 벌어진다. 

기능적수그루의 꽃 단면. 여름이 무르익을 때 꽃의 내부는 수컷의 활동이 암컷의 부화를 이끄는 것으로 분주하다. 새까만 몸에 날개를 단 생명체가 천선과좀벌 암컷이다. 꽃이 벌어진 정수리 부근에 꽃밥이 터져 꽃가루가 흥건하다. 암컷은 산란하기 위하여 꽃밥을 묻힌 채 벌어진 길을 통과해서 다른 꽃을 찾아간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가을이 오기 전에 어미 천선과좀벌은 산란을 위해 다른 꽃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 든다.

잉태한 암컷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기회다.

자신의 알을 겨우내 정성껏 돌볼 ‘기능적수그루’의 ‘불임성암꽃’을 고대하며 어미는 목적지를 택한다.

도착지가 어디냐에 따라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산란과 월동과 이듬해 부화로 이어지는 생존의 길이 될 수도 있고 어미도 알도 다 죽고 마는 참변의 길이 될 수도 있다.

‘기능적수그루’만이 알을 품을 수 있으니, 암컷에게는 그들의 도착지가 암그루만 아니면 된다.

만약 어미 천선과좀벌이 도착한 곳이 ‘암그루’면?

어미도 죽고 알도 죽는다.

그야말로 일가족의 참변이다.

암그루에 도착하게 된 암컷이 그곳에 알을 낳을 수는 있지만 그 알이 부화할 방법은 없다.

거기에는 본래의 주인인 꽃의 밑씨가 일찍부터 자리를 꿰차고 있기 때문이다.

암그루는 ‘기능적수그루’인척 그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암컷을 유인한다.

그 전술에 넘어간 암컷이 저쪽 꽃에서 꽃가루를 묻혀오면 암그루의 꽃은 수정에 성공하고 과육을 늘이고 씨앗을 단단하게 만든다. 

반대로 천선과좀벌에게 암꽃은 자신과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장소가 된다.

천선과나무 열매가 익으면서 분비되는 특유의 성분은 단백질을 분해하는 능력을 지녔다.

안타깝게도 천선과가 익을수록 암컷의 몸은 서서히 녹게 되는 것이다.

천선과나무의 이 무시무시한 성분은‘라텍스’의 일종이다.

‘라텍스’를 고무나무에서 많이 얻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천연고무’와 ‘라텍스’를 동일시하기도 한다.

천선과나무는 고무나무와 같은 혈통의 Ficus속이라서 체내에서 라텍스를 만드는 성정도 고무나무와 비슷하다.

천선과가 익으면 익을수록 천선과좀벌 암컷의 몸은 녹고 녹아 아스라이 사라진다.

그렇게 알도 어미도 모두 흔적도 없이 없어지면 천선과와 무화과가 무르익는 가을이다. 

나는 천선과의 단맛을 안다.

재배하는 무화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야생에서 오는 특별한 달콤함이 천선과에게 있다.

물론 무화과처럼 오랜 시간 개량되어 수많은 사람을 현혹하는 ‘키치성’이 천선과에서는 떨어진다.

모양도 맛도 좋은 서양의 무화과에 대적하고자 동양의 천선과를 개량하기 위한 숱한 노력이 일찍이 일본에서 시도되었다.

하지만 매번 국제무대에서 무화과의 상품 가치를 따라잡지 못했다.

최근에는 육종된 무화과를 공격하는 특정 질병에 내성을 지닌 유전자가 천선과의 몸에 있으니, 이러한 장점을 접목한 육종법이 지금의 무화과 재배 농가에 보급되기를 희망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국도 2호선 영암 구간에서 무화과 한 박스를 사면서 우리 숲의 천선과나무를 생각한다.

오랜 역사와 끝을 알 수 없는 가능성과 여전한 신비로움을 동시에 품고 있는 지구의 생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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