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가천리 체화당 배롱나무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상주시 가천리 체화당 배롱나무는 수형(樹形)이 매우 아름다운 정원수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상주 가천리 배롱나무는 체화당(棣華堂) 마당에 있으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체화당 배롱나무는 높이가 6m 정도이고, 가슴높이 둘레는 1.4m 정도 된다.

줄기에서 힘차게 뻗어 나온 가지들이 꿈틀대며 사방으로 펼쳐지면서 잔가지들을 만들어내고 무성한 잎들을 피워냈다.

무수한 잔가지를 계속 만들어내 줄기 위 공중을 촘촘하게 장악했다.

균형 잡힌 매우 아름다운 수형이다. 

배롱나무는 주로 관상용으로 재실(齋室)이나 정자, 연못 주변에 많이 심었다.

한여름에 화려한 붉은 꽃을 피운다. 꽃이 오랫동안 온 나무에 순차적으로 피어서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체화당(棣華堂)은 월간(月澗) 이전(李㙉:1558~1648)이 후학을 양성하던 학당 건축물이다.

이전의 셋째 아들인 이신규(李身圭)가 인조 10년인 1632년에 처음 지었으며 1771년(영조 47)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1986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8-1호로 지정되었다.

처음 체화당이 준공되었을 때 이전은 일흔넷의 고령이었다.

이전은 그로부터 무려 17년을 체화당에 더 머무르며 후학을 양성하다가 91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다소 생소한 당호인 ‘체화당’에서 ‘체화’는 직역하면 ‘화려한 산앵두나무꽃’이라는 뜻인데 형제의 우애를 의미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편의 '녹명지십(鹿鳴之什)'의 ‘상체(常棣)’ 첫 구절에서 가져왔다.

산앵두나무 꽃 화려하니 (常棣之華)
꽃받침 훤히 드러난다 (鄂不韡韡)
지금 내 아는 사람 중에 (凡今之人) 
형제만 한 사람 없다 (莫如兄弟)

'시경'에 실린 ‘상체(常棣)’는 상당히 길다.

전체적으로는 형제애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특히 위급할 때일수록 형제애는 빛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체화당’은 이전과 그의 동생 창석(蒼石) 이준(李埈:1560~1635)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당호라고 한다.

충효나 안빈낙도(安貧樂道)를 표현한 당호는 많아도 형제애를 담은 당호는 드물다.

임진왜란 중에 이전과 이준 형제의 애틋한 우애를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이전의 문집인 ‘월간집(月澗集)’에 실려있다.

이 기록은 ‘월간집’이 발간될 당시 영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이상정(李象靖)이 직접 쓴 것이다.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이듬해 2월, 경상북도 상주에서 정경세와 상주의 유학자들로 이뤄진 의병 진(陣)이 왜적의 공격으로 함락당했다. 이때 의병 진에 참여했던 상주의 유학자 이전과 이준 형제는 왜병들을 피해 백화산 정상으로 피하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 이준이 토사곽란을 일으켜 쓰러져 탈출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그러자 이준은 형의 손을 부여잡고 “저는 병으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형님께서는 빨리 여기를 탈출하셔서 선조의 제사를 이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나 형인 이전은 완곡하게 거부하며 “옛날에 형제가 도적들과 맞붙어서 죽기로 싸운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고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뒤 동생 이준을 등에 업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칼을 뽑아 들고 오는 두 명의 왜적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전은 “하늘은 우리가 잘못함이 없는 것을 아실 것이다”라고 부르짖고는 산을 우러러 “바라건대 산신령들께서는 우리를 살려 주소서”라고 축원하였다. 그런 이후 활에 화살을 메겨 왜적들에게 쏘면서 왜적들을 입으로 꾸짖자 그 소리와 기상이 엄숙하여서 왜적들이 놀라 접근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세월이 흘러 아우 이준은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1604년 이준은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중국 관료들과 지난 임진왜란을 회고하다가 자신이 형에게 구출되어 살아난 이야기를 했다.

이때 중국 관료들은 이준의 이야기에 크게 감동하여 명나라 화공을 시켜 당시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이 그림이 이름하여 ‘월간창석형제급난도(月澗蒼石兄弟急難圖)’다.

그림이 완성되자 이준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에게 이를 소재로 한 시문(詩文)을 청하여 받은 뒤, 부록으로 그림 뒤에 붙여 책자 형태로 만들었고, 그 책자는 오늘까지 전해온다.

현재 형제급난도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체화당과 배롱나무는 형제간의 우애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 여전히 그의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이 소중하게 지켜오고 있다.

체화당에서 가까운 곳에 이전의 아우인 이준을 기리는 ‘창석사당(蒼石祠堂)’이 있다.

애틋했던 형제애를 기념하듯 창석사당은 체화당과 함께 묶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고, 지정번호 제178-2호가 됐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가천리 체화당 배롱나무는 여름이면 나무 가득 화려한 붉은 꽃들을 쏟아내 탄성을 자아낸다.

마치 옛 형제의 우애에 경의(敬意)의 박수를 보내고 축하해주는 듯하다.

체화당 배롱나무는 수형이 매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우애가 극진했던 형제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나무다.

<상주 가천리 체화당 배롱나무>

·보호수 지정 번호 14-08-03
·보호수 지정 일자 2014. 7. 4.
·나무 종류 배롱나무
·나이 382년
·나무 높이 6m
·둘레 1.4m
·소재지 상주시 청리면 가천리 650
·위도 36.323763, 경도 128.10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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