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국악인 김용배의 삶과 죽음을 다룬 詩

고(故)김용배의 예술혼을 시적으로 조망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 『저, 미치도록 환한 사내』는 시인 김윤배의 3번째 장시집이다.

이 시집은 한국사물놀이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고(故)김용배(1952-1986)의 짧은 일생과 그의 예술혼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한국전통음악은 장악원과 같은 조선 왕조 공식 음악기관의 음악에서부터 기층민중이 즐겼던 민간음악까지 광범위한 형태가 존재한다.

그중 민중에게 가장 익숙한 음악이 바로 풍물이다.

‘풍물(風物)’에서 풍은 ‘놀다’, 물은 악기를 의미한다. 즉 풍물이란 악기를 가지고 노는 여러 음악 행위를 통칭하는 것으로 기층민중 사이에서 발생한 가장 자연스러운 우리 음악이다.

풍물굿, 풍물놀이, 농악 등이 모두 풍물이다. 풍물은 농사일에 흥겨움을 더하는 요소로 사용되어 농악으로 기능하고, 여러 세시풍속에서 판을 흥겹게 한다.

각 지역의 무속음악과도 깊은 연관을 지니면서 굿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된다.

풍물놀이의 악기편성은 꽹과리, 장구, 북, 징, 나발, 태평소 등이다. 정월대보름, 단오, 추석 등의 명절 세시 풍속놀이에 풍물은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풍물놀이는 한국 전통 민간 악단의 연주와 발림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풍물놀이의 연주자 혹은 연희자는 보통은 전통 마을에서 윗세대로부터 대대로 자연스럽게 습득한 마을의 풍물패이다.

풍물패는 농사일을 하면서 비정기적으로 연습을 하고 명절과 같은 날에 공연을 하는 아마추어 집단이었다.

이에 비해 직업적이면서 전문적인 기예 집단이 사당패다. 사당패는 일반적으로 특정 사찰을 거점으로 삼고, 여러 지역을 떠돌며 공연과 걸립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간 예인 집단이다.

사당패는 조선 세조 때부터 농토에서 유리된 남녀가 사찰을 생활터로 삼아 비승비속의 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집단에서 남자를 거사, 여자를 사당이라 했고 이들 집단을 사당패라 했다. 사당패는 조선 중기, 임란을 거치면서 양적으로 팽창을 하여 조선 8도를 무대로 그들의 고유성을 확정한다.

이 사당패는 18, 19세기에 이르면 남사당, 걸립패, 놀량패 등으로 더욱 전문화되거나 특정 지역에 정착하며 지역 음악 또는 무속음악과 혼·융합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당패의 활동은 19세기 말 개화기 이후에 거의 사라지고 지역에 정착한 일부 남사당이나 풍물패 등에 의해 전승되었다.

1970년대 한국은 본격 산업화시대를 맞이하면서 풍물놀이도 더욱 자연스럽게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자구적 노력이 일어난다.

악기편성을 단순화하고 실내공연이 가능한 변화가 바로 그것인데, 이게 바로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꽹과리, 장구, 북, 징의 네 가지 타악기로 편성되며 보통은 꽹과리가 음악을 리드한다.

1978년 사물놀이가 탄생할 때 주도한 예인이 바로 김용배,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4인이다. 초창기에는 김용배가 상쇠 역할을 하며 음악적으로 이들을 리드했다.

실내악으로도 공연할 수 있게 설계된 사물놀이는 그 후 한국의 대표적인 국악 장르로 국내외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사물놀이 창시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이후 국립국악원에서 단원 생활을 하다가 1986년, 35세 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천재적인 타악기 주자 김용배는 과연 누구인가?

그의 삶과 예술에는 도대체 어떤 비의(秘意)가 숨어있을까?

김윤배의 장시집 『저, 미치도록 환한 사내』는 그런 의문에 차근차근 입체적으로 답을 해나가는 시집이다. 김용배를 잘 아는 후배인 남기수의 증언과 김헌선의 저서 『김용배의 삶과 예술』

을 토대로 시인 김윤배는 김용배의 죽음과 그 주변, 그의 예술혼을 시적으로 재조명한다.

일반 서사시와는 다른 입체적인 인물 조명

이 시집의 발문을 쓴 홍신선 시인은 “장시 『저, 미치도록 환한 사내』는 한 예인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다. 흔히 한 인간의 생애를 다룬 경우는 객관 사실에 근거한 서사를 축으로 삼는다. 이는 서사시 일반이 보여주는 시적 틀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 시인의 장시는 이런 서사시의 틀을 단연 도외시하고 있다. 인물과 생애적 사실들 위주보다는 등장인물 간의 대화나 일련의 삽화들, 그리고 화자의 주관적 정서적 반응이 집중적으로 표출된다. 말하자면 인물과 그의 생애사(生涯事)는 가급적 뒤로 놓이고 주관적, 정서적 진술이 보다 전경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면심리를 축으로 한 서정시의 영역이기도 한데, 화자의 진술에서 환유나 은유 등 시적 수사가 빈번한 탓도 클 것이다. 가늠컨데 바로 이런 점이 이 작품을 장시로 갈래 잡은 이유는 아닐까. 알려져 있듯 근대시 이후 서사시와 장시는 그 명칭과 갈래 규정이 뒤섞여 왔다. 이는 장편이라는 작품의 규모 탓이 클 터이다. 지난날 김동환, 임학수, 김해강, 신동엽 등등의 선편 시인들이 누구는 서사시, 누구는 장시라고 제각각 일컫지 않았는가. 하지만 서사시는 사실과 사건을 중심으로, 장시는 서정성을 축으로 삼는다는 갈래 구분은 일단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김 시인은 지난번 장시 「사당 바우덕이」, 「시베리아의 침묵」도 장시로 갈래 규정을 했다. 이러한 갈래 의식은 이번 장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셈이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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