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백두산을 야수적 생명체로 환생
'자화상'...바닷바람 견뎌내고 기어이 무언가를 완성하려는 결의에 찬 모습
'동해바다'..남색의 소용돌이 파도, 동해바다의 깊이감 드러내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박경희 화가의 '풍성한 주방'(50호 200년)
박경희 화가의 '풍성한 주방'(50호 200년)

▲풍성한 주방(50호 2008년)

정물화이지만 동적인 활력과 극적인 긴장감이 고조되어 있는 매우 공세적인 성격의 그림이다. 주방의 풍성한 찬거리를 주요 소재로 하고 있는데 대부분 생선과 어패류이다. 그 중에서도 생선과 꽃게가 주인공이다. 큰 생선들은 수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잉어로도 보인다. 그렇다면 게도 민물 참게가 아닌가 여겨진다. 생선은 막 잡아올린 것처럼 살아 꿈틀거리는 듯 신선해 보인다. 도마 위에 있는 잉어는 목이 잘려져 내장의 포가 떠진 채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제 곧 양념과 야채류와 함께 매운탕 거리로 큰 냄비에 담겨질 운명이다. 여기서 꽃게의 위치가 주목을 끈다. 꽃게들은 저마다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팔딱거리고 있는 느낌을 안겨 준다. 꽃게들의 위치는 미끄러운 주방 타일 조리대의 모서리에 밀집되어 있으면서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긴장감을 전해주고 있다.

마치 서구의 근대화가 세잔의 정물화에서 보이는 식탁보 위의 과일들이 모서리 부분에 걸쳐 있으면서 쏟아질 것 같은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위 그림의 정물은 생물들이이서 그 긴장 강도는 단연 비교우위이다. 이 그림은 극사실화풍이면서도 선이 굵고 색감과 붓터치가 강렬하다. 작가는 모순적으로(?) 살아 있는 생물들의 정물화를 즐겨 그리는 듯하다.

박경희는 원래 경기도 평택 출생이지만 평양에서 주로 활동한 작가로 평양인의 맹호출림(猛虎出林)의 투쟁적인 기상이 유달리 돋보인다. 박경희는 색감이 타는 듯 자극적이면서 도발적이고 복잡한 구도를 애호하고 남성적인 웅장함과 강렬한 붓놀림이 전매특허다. 하지만 작가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풍요로운 정서의 일단을 밝혀주고 있다.

주방 창가를 통해 비치는 실외의 소담스러운 설경(雪景)을 노출시키면서 닫힌 공간의 답답함까지 해소하는 이중 효과를 동시에 전파하고 있다. 창 밖에는 흰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정경이 아스라하게 펼쳐지면서 찬 색조의 생선 비늘과 대비를 이룬다.

이 그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하면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위 그림을 감상하면서 식사 전 식감에 영향을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린내가 난다고 하면서 치우라고 말했다는 풍문이다. 하지만 그가 배가 고팠다면 비늘의 청록색이 신선감을 풍기어 오히려 식감을 자극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 메뉴를 매운탕으로 하자고 독려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경희 화가의 백두산 (120호 2009년) 
박경희 화가의 백두산 (120호 2009년) 

▲백두산 (120호 2009년)

이른 아침에 타오르는 붉은 노을이 빙하기 백두산의 눈을 부시게 하며 단잠을 흔들어 깨운다. 인기척을 느낀 백두산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거대한 기지개를 켜니 천지(天池)가 요동친다. 얼어붙어 있던 천지의 갈리진 틈바구니로 아침해가 몸을 담근다. 아침햇살은 백두산 마디마디에 빙하의 껍질을 녹여내면서 백두산의 혈액을 흐르게 하고 맨살을 드러내게 한다.

이 화가의 몸에 밴 격렬하고 역동적인 필치는 백두산을 태고적 빙하기 원시시절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고 야수파적인 대담한 원색의 색채 표현과 하늘, 산맥, 천지를 황금비율로 나눈 절묘한 삼등분의 안정적인 구도는 백두산을 야수적 생명체로 환생시켜 포효의 메아리를 천지(天地)간에 진동시키며 장엄한 기상과 신령스런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백두산의 모습을 유화의 센 붓질로 이토록 거칠고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은 지금껏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이 화가의 독창적인 색상 처리, 개성적인 형상 표현방식과 힘찬 붓질은 백두산을 태고적 빙하기로 끌어다 놓고 가히 전지구적인 생명체의 시원이요, 고대 우리민족 역사의 발상지로서 그 신비로운 위용의 베일을 벗기고 에너지를 뿜어내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박경희 화가의 '자화상'(20호 1988년)
박경희 화가의 '자화상'(20호 1988년)

▲자화상(20호 1988년)

반신의 정면상을 우뚝 세운 자화상은 불어오는 바다 바람을 가르며 더욱 억세고 거칠게 몰아닥칠 파도를 타고 동해바다로 나아갈 채비를 단단히 차리고 있다. 베레모를 쓴 노화가는 바닷바람을 견뎌내고 기어이 무언가를 완성하려는 결의에 차 보인다.

또한 전투 태세에 임하는 전사처럼 그림붓을 칼처럼 다부지게 잡고 목도리를 바람에 휘날리면서 그 무엇도 내 앞길을 막아서지 못한다는 자신감도 넘쳐 보인다. 하지만 그의 이런 긴장을 맑은 창공 위에서 갈매기들이 날개짓과 노래소리로 풀어주고 있다.

작가는 장엄한 바다 위를 대범한 마음으로 누비려는 심산인 것 같으면서도 그에게 주어진 화가로서의 과업, 즉 바로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동해바다의 대작 완성을 향한 소명의식 혹은 임무 완수의 집념과 투지가 얼굴 곳곳에서 돌출되고 있고 눈동자 속에 핏발처럼 스며 있다.

실상의 화판 크기만으로는 그의 세상 담기는 역부족인 듯이 위의 자화상에서 표현된 것처럼 화판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고 화판의 고정이 힘겹고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그가 화판에 구사하는 힘은 끓어 넘치고 역동적이다.

박경희 화가의 '동해바다'(120호 2009년)
박경희 화가의 '동해바다'(120호 2009년)

▲동해바다(120호 2009년)

파도를 잘게 부숴놓는 하얀 포말과 거품은 무엇이든 뒤덮어 삼켜버리는 성난 파도로 변신하기 직전의 폭풍 전야의 울렁거림 현상인 듯하다. 마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이 분수처럼 용솟음치면서 산기슭으로 콸콸 쏟어져 밀고 내려오기 전의 잠재된 힘의 서막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투명한 연두빛깔의 물결과 으르렁대며 맞부딪치는 짙은 남색의 소용돌이 파도의 색상은 명암 대비를 통하여 더욱 선명해지고 깊이감을 드러내는 장관을 연출한다. 수평선 위에는 주황과 뒤섞인 보랏빛으로 노을지며 퇴장하는 하늘빛이 짙푸른 파도와 아련한 보색을 이루며 다시 한번 동해바다의 깊이를 밝혀 주고 있다.

유화의 전통적인 곰삭은 맛깔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회화성 짙은 그의 작품은 조선화에서는 맛보기 힘든 또다른 고유한 매력을 선사하고 있다.

이래서 자기 분야에서 절정의 경지에 오른 화가들의 작품성은 결국 다양한 개성과 창의력의 견지에서만 비교 감상될 뿐만 아니라, 예술의 특정 분야 자체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이러한 견지에서 비추어 보면 예술의 특성에 맞지 않는 일이 된다.

박경희 화가
박경희 화가

◇박경희(1936-작고?)는 누구인가?

박경희는 1936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하여 평양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1953년에 평양미술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59년에 유화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1959년부터 모교에서 소묘강좌교원으로 있었고 1965년 이후부터 평안남도 미술제작소와 남포시미술창작사 미술가, 미술작품국가심의위원회 남포시 책임심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작가에 대한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영상주제 창작에서 그는 기초실력이 높고 조형적 처리를 대담하게 함으로써 심오한 사상적 내용에 상응하게 회화성을 실현하였다. 역사문헌적 의의를 가지는 주제의 작품들은 기록적인데 머무른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으로서의 풍격을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고 있다.

그는 활달한 필치, 활동적인 묘사기법,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반향과 민감성 있는 미술가로서 그의 창작적 성과를 믿음직하게 안받침하고 있다. 그는 늘 현실속에 들어가 인민들의 생활을 깊이 공감하며 그 속에서 가치 있는 생활소재를 발견하고 시대적 주인공을 찾아내며 자기의 화필을 시대의 전진에 맞추어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답보와 침체를 모르고 부단히 전진하며 약동하는 것, 그것을 개성화된 필체로 민감하게 반영하려는 것이 그의 창작 자세이고 입장이다.”

박경희는 북한의 유화가 중 움직이는 모습을 가장 생동적으로 잘 포착하며 유화다운 맛이 흠뻑 나도록 격동적이고 탄력있게, 살아 꿈틀대듯 이글거리는 표현 방식으로 묘사하는 화가로 정평이 나 있다. 주방에 살아 펄떡거리는 생선의 정물화를 두고 북의 최고지도자가 ‘비린데가 물씬 난다. 치우라우’라고 말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는 이를 잘 방증한다.

나는 북한의 유화가 중 1세대 유화가를 제외하면 박경희와 최제남 화가를 제일 좋아한다. 최제남은 이태백과 같이 취기어린 감흥으로 춤추는 듯한 낭만적 묘사력이 돋보이는데 비해, 박경희는 엄숙주의가 깔려있다.

그의 형상 표현 속에는 시인 두보와 같이 중후한 비애가 서려 있고 저 너머로 간절한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하는 목마름이 느껴진다. 그리고 박경희의 그림은 힘과 기백이 넘친다. 보고 있노라면 그의 기상에 포섭되는 듯한 느낌이 엄습한다.

사실주의 화풍 속에서도 사물의 반영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사물과 현상이 가진 특성의 정곡을 파고들어 개성적인 힘찬 붓질과 굵은 선의 휘두름, 그리고 색상의 심연에 아득히 퍼져 있는 독특한 미학으로 사물을 재창조해내는 마력이 그의 화판 도처에서 넘실댄다.

이는 현대 회화의 흐름이랄 수 있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왜곡과 굴절을 통한 변형이라는 특성 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느낌으로 밀려온다. 박경희의 그림 속에서는 사물과 현상의 맥박소리가 들리는 것같은 현장감과 진실성 있는 서정미, 그리고 금방이라도 캔버스를 뚫고 나올 것같은 끓어오르는 힘이 있다는 표현이 적당하다고나 할까?

박경희 리경숙 화백은 부부 월북화가로 많은 명작들을 창작하여 부부 공히 인기와 명성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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