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캐나다의 초·중·고교에 다닐 적에 우리 아이들은 학기말이면 성적표를 들고 왔다.고등학교 때는 영어 90점, 수학 80점 하는 식으로 과목별 점수가 성적표에 적혀 있었다.그 옆에는 과목 담당 선생님들의 평가가 있었는데, 점수가 높든 낮든 간에 ‘무엇을 잘한다’고 칭찬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학과별 교사들이 아이에 대한 의견을 일일이 적는 것 못지않게 낯설었던 문화는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평균 점수가 90점이 넘든 70점 아래든 몇 등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어느 과목 성적이 눈에 띄게 좋아 보여서 아이에게 무심코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너보다 더 잘한 아이 있어?”질문을 받자마자 아이는 기겁을 했다.엄마 아빠가 보기에 잘했으면 그냥 잘했다고 칭찬만 하면 그만이지, 왜 남들과 비교를 하며, 더 잘한 아이가 있든 없든 그게 내가 받은 성적과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아이가 이렇게 정색을 하며 따지고 드는 바람
【뉴스퀘스트=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지난주에 소포를 하나 받았다.이번 여름에 대학공부를 마친 큰 아이의 학교에서 보내온 것이었다.코로나19 사태로 졸업식을 할 수 없게 되자 캐나다 대학들은 집으로 졸업장을 발송해 주었다.소포상자에는 졸업가운 휘장, 기념 티셔츠와 파티용 폭죽까지 들어 있었다.비록 교정에서 사진 한 장 찍지 못했으나 아쉬움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아이가 졸업장을 받은 것 자체만으로도 많이 기뻤다.장애를 가진 아이가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취직까지 했으니, 내 생애에 이렇게 ‘빛나는 졸업장'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큰 아이는 청각장애자이다.두 살 때 아이의 청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우리 부부는 아이의 교육에 줄곧 몰입해왔다.목표는 단순했다.아이가 보통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었다.아이가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아이 엄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잘 듣지를 못하니 수화를 가르쳐야 했으나 수화를 사용하면 일반인
【뉴스퀘스트=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돌이켜보면 기자로 일을 할 때 나는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1980년대 후반 언론 민주화 바람을 타고 를 비롯한 많은 매체가 창간되고 군부독재에 항의하다 해직된 기자들이 속속 복귀하던 시절이었다.비판 칼럼을 썼다고 국군정보사령부 장교들한테 기자가 대검 테러를 당하는 일도 벌어졌으나 그런 일들이 언론 민주화라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수십 년 동안 눌리고 위축된 언론의 자유분방한 에너지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언론 업계에는 활기가 돌았다.1990년대 기자들은 두 가지 과실을 동시에 손에 쥘 수 있었다. 취재 성역이나 검열 같은 것이 대부분 사라지면서(여전히 안기부 담당자가 회사 주변을 맴돌며 사찰은 했지만) 뉴스를 굴절없이 전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를 세우는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이 넘쳤다.기자 초봉이 웬만한 대기업의 2배쯤 되는 것 또한 기자로서의 자부심을 드높이는 데 일조했다.높은 연봉은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
【뉴스퀘스트=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나는 대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인문학 전공자의 대학원 진학은 평생 연구자(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수)로 살고자 하는 것을 의미했다.대학 4학년 때 교수 연구실을 찾아가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습니다"라고 상의 드린 적이 있다. 나는 곧장 이런 질문을 받았다.“집에서 뒷바라지는 할 수 있니?”인문학은 돈이 있어야 하는 공부였다. 전공에 따라 학부 때부터 기업의 지원은 물론 병역혜택까지 받기도 하는 이공계와 달리,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런 외부지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이른바 프로젝트 같은 것도 전무했다.집에서 받는 지원이 인문학 연구자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느냐 여부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었다.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부모님 또한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니 힘 닿는 데까지 지원해주자'고 막연히 생각하셨을 것이다.
【뉴스퀘스트=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몇년 전, 십수년 만에 만난 옛 직장 여성동료한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함께 일하던 시절 가끔씩 야한 농담을 해서 화통하다고 생각했던 동료였다. 그이는 자기가 그런 농담을 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고 털어놓았다.“남자들이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하니까, 어색해하는 대신에 도리어 내가 막 나간 거다. 더 하지 말라고.”말하자면 그 여성동료가 성적인 농담을 했던 까닭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남자들의 그런 말들을 앞서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함께 일을 할 때만 해도 나는 그 동료가 유쾌하고 거침없는 줄로만 알았다.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이 역시 남자들이 늘어놓는 성적 농담에 대해 매우 불편해 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그런 속내를 십수년이 지나 털어놓았다는 사실은 그 불편함이 그만큼 크고 깊고 오래 갔다는 것을 의미했다.나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이후 관심을 가지고 다른 여성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우리 연배 대다수
【뉴스퀘스트=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20여년 전 캐나다에 살러오자마자 영어학교에 등록을 했다.새로 온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무료로 가르치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프로그램이었다. 한 반 정원은 30명 정도. 쉬는 시간이면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모여서 정착에 필요한 정보를 나누곤 했다.우리 반에는 나를 포함해 한국 사람이 4명 있었다. 통성명을 하고 “언제 왔느냐"와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지금 사는 지역에 대해서도 서로 궁금해했다. 한 사람이 “나는 OO에 산다"고 하자 나머지 세 사람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똑같이 물었다. “거기 괜찮아요?”‘괜찮냐’는 질문은 곧 ‘위험하지 않느냐’ ‘시끄럽지 않느냐' ‘더럽지 않느냐' 등의 뜻을 담고 있었다. OO은 주로 흑인들이 사는 동네라는 사실을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도 많았으나 “가서는 안 된다"라고 콕 집어 지목된 곳은 OO뿐이었다.그런 말을 듣
【뉴스퀘스트=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머무는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토론토 집콕 루틴’이 생겼다.하루 일정 가운데 하나는 아침식사를 하며 한국의 MBC 뉴스데스크 시청하기.최근 뉴스 아이템 2개가 연달아 보도되는 일이 잦았다. 코로나19의 새로운 전파지로 지목된 코인노래방과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파문.두 사안이 딱히 연관성은 없으나 2주가 넘도록 뉴스에서 함께 보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노래부르기’와 ‘기부’ 문화의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80년대 초 대학생이 되어 드나들기 시작한 학교 앞 술집에서 신기한 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술집의 모든 탁자들은 쇠 테두리를 하고 있었다.그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술을 마시며 우리는 노래를 불렀고 쇠젓가락으로 탁자를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날이면 날마다 쇠젓가락으로 두들겨대니, 나무 탁자가 남아날 리가 없었다. 술집 주인들은 쇠 테두리를 둘러 탁자를 지켰다.술집 노래부르기 문화는 직장에 들
【뉴스퀘스트=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5월10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3주년 특별연설 이후 SNS에서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문제가 된 것은 회견장 맨 뒤에 앉은 사람의 ‘츄리닝’ 복장.대통령과 공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기자가 어떻게 저런 복장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보기에 츄리닝(정확하게는 모자 달린 재킷)을 입은 사람이 기자 같지는 않았다.동영상을 보던 중에 오히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넥타이를 매지 않은 남자 기자들의 차림새였다.취재 중 넥타이와 관련한 강렬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1996년 프랑스 칸영화제를 취재한 적이 있다.1989년 창간 당시부터 우리 회사(옛)는 기자단에 가입하지 않아 모든 일을 따로 해야 했다.프레스카드 신청 안내서를 보니 회사소개서와 영화 관련 본인 기사 2건, 증명사진 2장을 칸영화제 사무국에 내라고 했다. 소개서와 기사는 영어로 번역해 팩스로, 사진은 우편으로 보낸 기억이 난다.신청만 하고 승인 여부는 확인 못한
【뉴스퀘스트=성우제(캐나다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캐나다에 건너온 한국 사람들이 가장 먼저, 공통적으로 맞닥뜨리는 불편함이 한 가지 있다.바로 느림보 문화이다.모든 것이 빨리빨리 돌아가는 한국에 비하면 캐나다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느릿느릿이다. 관공서에 가면 속 터지고 지하철은 느린데다가 툭 하면 고장이다. 승객 수십 명이 탄 버스를 길가에 세워두고 운전기사가 커피를 사러가는 광경을 목격한 적도 있다.이런 느린 문화 때문에 답답해하고 놀라워했는데 살다보니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느림보 문화 이면에 꼭 빨리 해야 할 일은 한국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문화가 존재한다.특히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일 처리는 너무도 빨라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나는 캐나다의 이 같은 ‘빨리빨리’ 문화를 이민 초기에 한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천하태평 느림보 문화가 보편화한 사회에서, 꼭 필요하고 긴급한 일이라면 전광석화처럼 해치우는 캐나다 특유의 방식을 나는 요즘
【뉴스퀘스트=성우제 在캐나다 작가】 캐나다에 살러 와서 처음 몇 년 동안은 한국에 관한 것을 일부러 멀리했었다.낯선 환경에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고 싶어서였다.4~5년쯤 지나 새로운 땅에 잔뿌리는 내렸다 싶을 즈음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달콤하기 그지없었다.한국 뉴스도 인터넷을 통해 다시 보기 시작했다.사전을 찾고 영어자막을 읽어가며 보고 듣던 캐나다 뉴스에 비하자면 우리 말 뉴스 역시 달콤했으나 그 사이 보도방식이 많이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특정 사안에 대해 언론사별로 꼼꼼하게 따져가며 보도하기보다는 한국 언론은 전반적으로 우루루 몰려다닌다는 인상을 주었다.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200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신정아씨 학력위조 사건을 접하면서였다.인터뷰를 하려고 신정아씨를 뉴욕에서 만났다.그이는 나를 보자마자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사람들이 나한테 왜 저런대요?”내가 보기에도 그랬다.예일대 가짜 박사학위를 내세워 대학교수에 임용되고 광주비엔날레 공
【뉴스퀘스트=성우제 在캐나다 작가】 고교시절의 일이다.어느날 반장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담임은 “등교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가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3교시쯤 교실 문이 열리더니 사고를 당했다던 반장이 불쑥 들어섰다.피묻은 거즈를 얼굴에 붙인 채였다. 수업을 하던 선생님과 반 아이들을 향해 그는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병원 가서 열 바늘 이상 꿰맸다. 오늘은 병원에서 지내라고 했는데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에 왔다.”그 말을 듣고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박수를 쳤다. 이후 몇 주 동안 반장의 얼굴에 붙어 있던 거즈는 영광의 표지였다.돌이켜보면 다치거나 아파도 결석하지 않는 분위기는 고교시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초등학교 때부터 개근상이라는 것이 있었다.결석은 물론 지각이나 조퇴를 안 하면 학년 개근상을 주었다. 졸업식 때는 초등 6년 개근상, 중고등 각각 3년 개근상도 있었다. 12년 개근을 하면 그랜드슬램이었다.우등상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상이었다.개근은 학교 바깥에서도
【뉴스퀘스트=성우제(在캐나다 작가)】 학교를 졸업한 후 내가 들어간 첫 직장은 주간지였다. 옛 이다.한국의 지를 표방한 이 잡지는 1989년 창간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풍부한 인적 자원과 물량공세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명망있는 언론인들이 수뇌부가 되어 편집국을 이끌었고 에서 스카우트된 미국인 아트디렉터가 시각 디자인을 담당했다.한국 잡지로는 처음으로 80억 원짜리 자체 윤전기를 들여와 노르웨이산 고급지에 인쇄를 했다.잡지로서는 역시 처음으로 워싱턴, 파리, 베이징에 특파원을 내보내기도 했다.편집국 조직도, 인원도 일간지와 비슷했고 기자 처우 또한 남부럽지 않았다. 창간부터 승승장구해 이후 10년 동안 정기독자가 10만 이하로 내려간 적이 거의 없었다.유가부수가 가장 많을 때는 20만부(정기독자 15만 포함)에 이르렀다. 한국 언론사는 1990년대를 시사주간지 전성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그 중심에 있었다.겉으로는 이렇게나 화려
뉴스퀘스트는 재캐나다 작가 성우제의 문화비평을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으로 연재한다. 성우제는 고려대 불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했고 1989년부터 옛 기자를 지냈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시사IN 편집위원. 시사주간지 일간지 미술전문지 등에 문화예술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느리게 가는 버스', '딸깍 열어주다' 등의 책을 펴냈다. 【뉴스퀘스트=성우제 (在 캐나다 작가)】 '라떼는 말이야' 류의 글이니 주의하고 읽으시라.고교를 졸업하고 20대에 막 진입할 무렵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술과 담배였다. 30~40년 전만 해도 음주와 흡연은 한국 남자에게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술은 담배와는 많이 달랐다. 술을 통한 성인식을 혼자 치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내 경우, 술은 매개체였다.술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사람을 만나려고 술을 마셨다. 20대 초반 술자리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술의 힘을 빌어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