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 초상화'...근엄한 외모와 내면의 다정함이 오버랩
'소풍'...자연이 주는 아늑함과 문화유산과의 소통 강조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엄도만 화가의 '꽃정물화'(8호 1961년)
엄도만 화가의 '꽃정물화'(8호 1961년)

▲꽃정물화(8호1961년)

꽃병 속의 과꽃과 국화들이 세찬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가지가 꺽이고 휘어지며 꽃잎이 떨어져 날리고 있다. 붉은 색으로 뒤덮인 바탕은 피로 얼룩진 시대적 배경이 연상되고 구겨진 화폭의 마티에르는 빗줄기의 형상을 연출시키고 있다.

꽃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인해 왜소한 꽃병의 몸집은 비바람에 휘둘리는 꽃들의 몸짓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면서 꽃병 자체가 넘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효과를 조성하고 있다.

과꽃은 국화과의 일종으로 원래 함경도와 만주 동남부 지방에 자생하던 우리나라의 토종 화초로 18세기 무렵 유럽으로 건너가 지금의 과꽃으로 개량되었다고 한다. 꽃대를 보면 코스모스를 닮았고 꽃잎은 국화와 비슷하여 두 꽃을 섞어놓은 듯하다.

국화와 같이 추위를 잘 견디는 생명력이 강한 꽃이면서 들꽃처럼 우리에게는 매우 친숙하며 색상이 다채로운 과꽃은 꽃말처럼 추억과 동심의 예쁜 꽃이다.

엄도만의 꽃정물화는 이쾌대의 국화 정물화처럼 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암울한 배경 속에서 우리 주변의 가장 친숙한 꽃인 국화꽃과 과꽃들이 힘차게 피었다가 풍상고초(風霜苦楚 : 찬 바람과 찬 서리를 맞는 괴로움과 아픔)에 시들고 스러져가는 형상을 우리들의 처지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두꺼운 종이 재질의 화폭에 굵은 구김살을 넣어 굵은 빗줄기가 연상되는 마띠에르 효과를 살린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기법으로 평가 할 수 있다.

엄도만 화가의 '소련군 초상화'(10호 1955년)
엄도만 화가의 '소련군 초상화'(10호 1955년)

▲소련군 초상화(10호 1955년)

그림 속 인물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소련 군인으로 전한다. 그림이 그려진 1955년은 6.25전쟁이 끝난 후 소련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소련측 다수의 인사들이 북한에 사절단으로 왕성하게 교류하던 시기이다. 그런데 그림 속 주인공은 수염을 기른 동양인의 얼굴로 봐서 일제 식민지시대 러시아 땅으로 건너간 우리 한민족의 후예로 보여진다.

러시아 레핀 미술대학 교수이자 화가 변월룡도 이 시기 북한에 소련의 특명을 받고 건너가 북한의 미술계 지원을 위한 특사로 파견생활을 했던 것처럼 이 그림의 인물도 소련 군인 신분으로서 북한에 사뭇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고 체류하는 중에 북한의 화가 엄도만을 만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림 속 인물의 풍모가 매우 위엄스럽고 진중해 보인다. 바탕색과 인물의 채색이 화폭 전면(全面)에 갈황색 계조의 모노톤(단색조)으로 깔려 있어 매우 차분하고 회상적인 인상을 풍긴다. 마치 목전의 현장에서 모델을 모셔 두고 그렸던 생신한 그림이 아니라 오래 전 마주했던 그를 추억하는 회고적 성격의 초상화 같은 여운이 전해져 온다.

근엄한 외모의 인상과 내면의 다감한 성격이 고스란히 오버랩되어 묵직함이 표출되고 있다. 콧수염과 턱수염이 풍만하고 눈썹과 눈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쳐져 있으며 긴 눈꺼풀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자태로 보아 강인한 인상을 풍기기 보다는 자애로운 덕장과 이지적인 지장의 생김새를 겸비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한편 그림 속 엄도만의 만년필체 같은 속필의 서명은 매우 탄력 넘치고 날카로워 뇌리에 진한 잔상을 남겨준다.

엄도만 화가의 '소풍'(33.5-25 1965년)
엄도만 화가의 '소풍'(33.5-25 1965년)

▲ 소풍(33.5-25 1965년)

엄도만은 어떤 주제와 구도건 탐구적인 자세로 화판을 창조하여 그 작품성이 늘 심오하고 진중하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소풍날 가벼운 마음으로 사생하듯 편안한 느낌으로 그린 그림이다.

한편 이 그림은 단순하고 소박한 풍경화인 듯하면서도 자연 환경 안에 아늑히 포섭된 문화유산의 얼과 숨결을 우리들이 경건하게 느끼고 소통하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자연이 제공하는 시원하고 상쾌한 산소 그늘 밑에 수혜받는 사람들이 자연의 고마움과 함께 선조들이 이룩한 고상하고 웅장한 사적들을 바라보며 음미하고 한번쯤 감회에 젖어보라는 메시지로도 들린다는 것이다.

소풍은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바람을 쐬는 일이나, 학생들이 교사의 인솔하에 야외에 나가 자연의 사물을 관찰하고 여러 가지 놀이를 즐기면서 하루를 보내는 일로 보통 정의한다. 50대인 나의 학창시절 소풍은 크게 봄과 가을 일년에 두번 갔던 기억이 난다.

소풍 전날엔 어머니가 새옷을 연례행사처럼 사주셨고, 소풍 당일 아침엔 새벽부터 김밥을 싸기에 여념이 없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되새겨진다. 본작은 65년도의 소풍날 풍경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궁이나 사찰로 여겨지는 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과 여선생님으로 보여지는 인물이 즐겁게 거닐며 담소하는 모습에서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감정의 느낌으로 소풍을 즐겼음을 느낄 수 있다. 입구로 보이는 고건축물에서는 주춧돌 위에 목조양식을 쌓아서 올린 전형적인 우리네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푸르게 우거진 수목은 내 마음의 심장과 허파가 정화될 듯 밀도 높은 싱그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너무나 평범하고 일반적인 소재지만, 그러기에 더욱 더 평온해지고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해주는 따뜻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소풍이란게 이 작품처럼 싱그럽고 따뜻한 일년의 의미 있는 행사이기를 기원하며 작품을 감상하기를 바란다.

엄도만 화가
엄도만 화가

◇엄도만(1915-1971)은 누구인가?

엄도만은 1915년 서울 출생으로 1929년 서울 주교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중앙청년학교에 입학해 요절한 천재화가인 김종태에게 유화를 배우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중학 시절에 유화 <자화상>을 그린 것이 1931년에 열렸던 서화협회전람회에 입선되었다.

이것이 연줄이 되어 1932년에 서울동양옵세트 인쇄회사의 화공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1936년부터는 유한양행 미술부장으로 3년 동안 미술주문품들을 받아 그리다가 중국항구에 이미 들어가 있는 림군홍의 알선으로 항구미술광고사 미술부에 입직하였다.

비교적 그림 그릴 조건이 유리하였던 여기에서 적지 않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 도쿄로 건너 갔으나, 일제의 징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항구로 돌아와 풍경화들을 그려가지고 베이징 등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엄도만은 비록 체계적인 미술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미술을 사랑하고 자기가 선택한 이 길에서 물러섬이 없이 꾸준하게 창작생활을 벌려온 미술가의 한 사람이었다. 해방전 미술창작은 생활을 위한 수단이었다.

10여명이 넘는 부모형제를 먹여살려야 하는 무거운 부담이 연약한 그의 양어깨에 지워져 있었던만큼 그림은 생계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간고한 생활 속에서도 장차 훌륭한 미술가가 되어 그리고 싶은 주제의 작품을 마음껏 창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전문적인 기량을 소유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엄도만 화가의 포스터(1955년 작)
엄도만 화가의 포스터(1955년 작)

 

엄도만 화가의 포스터
엄도만 화가의 포스터(1961년 작)

 

엄도만은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지만, 이쾌대, 임군홍 등 1세대 동료 화가들과의 교류도 활발히 하고 중국 등지에서 임군홍과 함께 자신들의 그림을 전시 판매하는 등 일찍부터 진취적으로 활약하며 실력을 갈고 다졌다. 유화로 출발하여 주된 작품들을 유화로 그렸으나 선전 포스터와 수채화, 출판화에서도 다재다능한 재주를 선보였다.

엄도만의 선전화들은 이전 소련에서 열린 세계평화를 위한 선전화전람회, 레닌 탄생 90돐 선전화콩클 등에 출품되어 높은 형상성을 보여주고 호평을 받았다. 또한 엄도만은 수채화, 도서장정과 삽화, 만화 등 출판미술 형식의 작품들도 많이 창작하였다.

이 그림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평이한 생활 소재를 선택하면서 아기자기하고 서정성이 풍부한 내용으로 충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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