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자...작가의 초상적 인물화, 내면의 심성이 배어있는 표정에서 인물의 기품이 흘러
림산 처녀'...미완성 조각 작품에서 굵직하고 강렬한 정서적 효과 풍기는 인상주의 정수
항구...그 곳으로 향해 떠나고 싶은 항구의 그윽한 풍경 창출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어순우 화가의 '기계공'(6호 1969년)
어순우 화가의 '기계공'(6호 1969년)

▲기계공(6호 1969년)

먹구름이 잔뜩 끼여 있는 하늘에 공간이 열리면서 둥그런 달님이 얼굴을 드러내듯이 온통 회색빛의 공장 안에서 소년공의 노랗게 이글거리는 얼굴이 붉으스름하게 비치고 있다. 풀썩풀썩 먼지가 날리는 공기와 기름때 냄새는 소년에게는 친숙한 환경 속 살가운 공기와 방향제 같은 냄새다.

그리고 기계가 돌아가는 진동소리와 쇠가 갈리는 소음이 오히려 소년에게는 리드미컬한 장단과 박자가 될 지 그 누가 알랴? 저 덤덤한 듯 흥에 겨운 표정은 참으로 묘한 표정이다. 밀링머신을 돌리는 소년의 표정은 긴장하면서도 깍여 나가는 철피 위로 당찬 집중력을 보이고 있다. 섬광이 번득이는 가운데 쇳가루 파편이 어깨와 얼굴로 날리면서 몸에 내려 앉는 것도 아랑곳할 새가 없이 기계는 부단히 돌아가고 소년은 기계의 일부 아니 차라리 한몸이 되어 가고 있다.

정녕 이 그림은 노동의 소외를 표현한 그림인 듯 해석할 여지를 보이면서도 정반대로 일터 기계공의 묵묵한 작업에 대한 집중을 강조함으로써 공장 일터의 작업을 독려하는 주제화적인 성향의 그림으로도 조명해 볼 수 있다.

기계 아래 부분에서는 시뻘건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고 그 아래에서는 이를 식히려는 프로펠러가 돌아가고 있다. 공장의 내벽은 합판과 같은 나무 색으로 되어 있어 견고한 기계의 모습과 대비하여 허름하고 남루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두꺼운 나무색의 마분지에 그려져 있어 색을 옅게 칠하면 건물 내부의 합판의 자연스러운 색감을 살릴 수 있게 되어 있어 절제된 색표현을 하는데 이롭다.

전체적인 색감은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듯 어두운 회색(Dark Gray)톤 위에 밤색(Brown)과 연하늘색(Pale Blue)을 간헐적으로 씀으로서 자칫 폐쇄적이고 드라이한 정서로 흐를 수 있는 방향에 다소나마 윤활유 역할을 한 작가의 절묘한 선택이 돋보인다.

붓터치 또한 당시 유행하던 전통기법보다 다소 거칠게 묘사함으로서 전체 주제와도 잘 맞는 테크니컬한 면이 엿보이기도 하다. 이렇듯 공장 내부가 합판으로 둘러쳐져 자칫하면 불에 타버릴 우려가 있는 위험한 공간이지만 소중한 그들의 일터이다.

그 일터에 또다른 주인공이 있다. 일하는 기계공을 감독하는 관리인의 경직된 얼굴이 드릴머신 사이로 보인다. 이 감독자가 마치 자본가의 모습으로 보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어쨌든 기계공은 자신을 주시하는 제3자의 시선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할 뿐이다.

어순우 화가의 '혁신자'(8호 1966년)
어순우 화가의 '혁신자'(8호 1966년)

▲혁신자(8호 1966년)

작가의 초상적 성격의 인물화는 주인공 내면의 고유한 심성이 침착하고 깊이 있게 배어 있어 표정에서 잔잔하게 인물의 기품이 흘러 나온다. 화가 자신의 인상 또한 지사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으며, 그의 그림들은 화가 이름의 풀이에서와 같이 지도자의 방침에 순응하여 고전적 사실주의 기법에 우직스럽게 충실하고 건설자들을 비롯한 사회 각계 인물들의 견실한 땀과 밝은 희망의 세계를 그린다.

작가는 이 그림에서처럼 얼굴 방향을 45도 각도로 향하면서 입체적이고 동적인 형상의 초상화를 즐겨 그리는데 인물의 표정이 한결같이 정갈하다. 또한 초상화 주인공의 자태는 화가의 진중한 성격을 고스란히 빼어 닮은 인물로 보인다.

또한 바탕의 배경색이 인물들의 얼굴과 옷차림에 투영된 색감 및 음영빛과 통일성을 이루어 전체 색조의 조화 속에 녹아 들어간 느낌을 준다. 혁신자라는 노인은 일터의 작업을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처럼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흡수하고 난 뒤의 표정과 차림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지혜를 발휘하여 더 발전된 일터의 작업을 위해 작업장을 돌아보며 휴식 속에서 충전의 여유를 누리면서도, 그에게서 일터를 향한 적극적인 애착과 묵묵한 결의를 다지는 노인의 헌신적인 체취가 느껴진다.

어순우 유화기법의 특징 중 하나는 잘 정제된 전체적인 톤 위에 인물의 표정이나 특징들을 면 분할적인 세부 텃치로 전통적인 유화기법을 마치 교과서적으로 잘 표현해낸다. 이 그림에서도 그의 물오른 테크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순우 화가의 '림산 처녀'(39-30 1966년)
어순우 화가의 '림산 처녀'(39-30 1966년)

▲림산 처녀(39-30 1966년)

림산은 자강도에 위치한 산악마을이다. 이 처녀의 복장은 상의는 연두색이고 하의는 고동색 차림으로 봐서 전형적인 군복용 색상이다. 전쟁시에 숲 속을 활보하는데 안성맞춤인 은폐용 위장복 색깔이다. 다부진 체격의 이 여성은 씩씩하면서도 당당한 군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한편 도도하면서도 복스럽게 도톰한 북한의 미인형이다.

이 그림은 화가에게 매우 친숙한 구도로서 그의 속도감 넘치는 붓질에 물 흐르듯이 이끌리고 자신감 속으로 끈끈하게 흡착된 아우라를 풍긴다. 화면 중심의 인물을 돌출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모든 대상을 힘센 붓질로 넓은 점을 뚝뚝 찍어 겹쳐 바르는 임파스토 기법의 실루엣으로 표현하였다.

주변 환경의 색조와 동화된 옷차림의 인물을 포함하여 좌측의 흩날리는 숲속 분위기와 우측의 눈 덮인 개울가 및 인물 주변의 어스름한 색채의 그림자까지 포함하여 말이다. 막대기를 짚고 서 있는 처녀는 먼 길을 가다가 잠시 쉬면서 쏟아지는 겨울 햇살을 반기며 묵상에 잠겨 있어 설경의 한복판에 깊숙이 파묻여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그림은 마치 미완성의 조각 작품에서 굵직하고 강렬한 정서적 효과를 풍기는 인상주의의 정수를 접하는 느낌을 준다. 인상주의는 빛보라(빛이 쏟아지고 확산되는 모양)의 세상을 화가의 감성과 빛과 대기의 운율이 짝을 이루어 자유자재로 번지게 하고 퍼뜨리는 화면을 구성한다.

일본 유학파가 대부분인 북한의 1세대 작가들의 1960년대 화폭에서는 특히 사실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인상주의의 풍미가 융합하고 상호 역류하여 격동치는 파도 물결을 이루듯이 물오른 자유스러움이 넘실댔다. 이렇듯 이질적인 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자극과 영감을 줄 때 비로소 신선하게 탈바꿈시키는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는 사례는 멀지 않은 미술사에서도 뚜렷하게 그 궤적을 드러낸다.

서구의 로코코 양식은 실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중국의 사치스럽고 섬세한 이국적 문물에 영향을 받아 태동하였고, 인상주의는 19세기에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등장한 일본의 우키이요에 판화 양식에 지대한 감화를 받아 변신을 거듭했다.

모네와 고흐 등 인상파 거장들의 화폭에는 광고를 하다시피 노골적으로 일본의 판화 그림들이 배경으로 등장하였고, 일본 판화의 밝고 화려한 색상과 평면적인 구도는 기존의 서양미술사 화풍의 가파른 꺽은 선 그래프를 만들어 놓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주류 제도권 내의 커다란 변화의 풍랑을 일으키려면 재야 미술계의 도전과 충격이 흡수되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입증된 셈이다.

어순우 화가의 '항구'(28-20 1963년)
어순우 화가의 '항구'(28-20 1963년)

▲항구(28-20 1963년)

1세대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감출 수 없는 기품과 무게감이 깃들어 있다.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그들이었기에 예술 작품에서 파란만장했던 시대의 한과, 고뇌, 그리고 꿈이 절절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안개가 희미하게 사라지고 동이 틀 무렵 새벽녘 어선들이 출항한다. 출항의 기적소리를 내뿜는 모든 배들에게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인사를 건네는 갈매기들이 힘차게 날면서 관람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짙은 청록색조의 바다와 옅은 남색조 하늘은 약간의 명도 차이를 보이며 서로 혼색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갈색조의 배들과 보랏빛 색감의 항구 시설물들은 아직 빛이 충만하지 않은 대기 속에 고유의 빛깔들을 간직하고 있다. 여명의 시기와 땅거미가 질 무렵 휘황스런 빛의 과잉 거품이 걷혀 있을 때 사물은 선명히 자기 본색깔을 드러낸다.

사물의 윤곽을 또렷히 각인시키고 빛이 가라앉은 채 사물에 잠복되어 민낯의 표면을 드러내는 시점이어서 담백스러움과 순수함, 그리고 중후함이 은은히 표출된다. 마치 여성이 어두움이 깔려 있을 무렵 더 아름답게 보이는 현상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대각선으로 기울어져 비치는 햇살을 경계로 하여 나룻배와 대형 어선들이 각각 좌우측으로 저마다의 물길을 향해 떠나가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다. 대형 고깃배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소형 어선들과 항구의 정박 구조물들이 비대칭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다.

작은 그림 속에서 모래사장과 잔잔한 파도를 맨 앞쪽으로 살짝 노출시킴으로써 망망한 대해의 다함 없음과 하늘과 닿아 있는 수평선은 아득한 이미지를 확장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잔잔한 파도와 침착한 배들도 서로에게 저녁에도 순탄한 모습으로 만날 것을 경건히 다짐하며 묵언의 기도를 보내고 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 어부들끼리의 격려와 희망의 소리들이 새벽의 시원스런 공기와 서서히 퍼져가는 절제된 햇빛, 상큼하고 짭짤한 바다냄새와 함께 군더더기 없이 어울려 있어 그리로 향해 떠나고 싶은 항구의 그윽한 풍경을 창출해내고 있다.

◇어순우(1923-1974)는 누구인가?

어순우 화가

어순우는 1923년 평안북도 신의주 근화동에서 출생하여 31년부터 41년까지 신의주 보통학교와 정주 오산중학교를 다니였다. 중학을 졸업한 후 미술을 배우기 위하여 서울에 갔으나 당시 우리 나라에는 미술학교가 없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고학의 어려운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는 미술분야에서 일본학생들과 경쟁하여 이기리라 결심하고 이악하게 그림공부를 하였다.

당시 일본미술학교에는 그림을 배우기 위하여 온 조선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학과 실력에서 일본 학생들보다 월등하였다. 그는 1944년에 일제의 학도병 징집을 피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체포되어 해방될 때까지 일본 본토에 남아 있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초기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에서 일하다가 그후 신의주 여자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어순우는 자기 작품들에서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체험과 정서를 반영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공장과 건설장, 농촌과 염전 등 일터 근로자의 영롱한 땀의 체취를 향기롭게 그렸다.

어순우는 일본 도쿄 니혼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문학신문사를 거쳐 조선미술가동맹지도원 현역미술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생활을 개성적인 눈으로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정서적으로 진실하게 묘사하였으며, 형상적 의도를 실현할 수 있는 예술적 기량과 정확한 소묘로 창작하여 북한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1세대 유명 화가이다.

그에 대한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의 평가를 일부 옮겨본다. “생활을 개성적인 눈으로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정서적으로 그려낸 그는 표현에서도 형상적 의도를 실현할 수 있는 예술기량을 소유하고 있었다. 복잡성을 피하면서 대상을 선명하게 나타낸 화면에서의 구도포치와 공간조성, 직선적이 아니라 현실에 가까우면서도 의도가 구현된 일반화된 색채 형상, 심리적 움직임을 나타내는 인물들의 적중한 행동포착, 정확한 소묘는 비록 크지 않으나 아담하면서도 째여진 형상을 창조할 수 있게 하였다.”

신의주 출신의 어순우 화가는 공식 기록에서 서울로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잠시 거처를 하다가 일본으로 고학을 떠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월북작가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지적이고 학구적인 그의 인상에서 월북작가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남한의 미술 평론가들은 월북작가를 대략 60명으로 추산한다.

그 월북작가들은 북한 미술계에 혁혁한 공로를 남긴 반면, 남한 미술계로서는 커다란 손실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남북한의 문화예술 교류가 활발해지고 통일이 다가올수록 그들 모두가 우리의 고귀한 문화적 자산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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