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달밤'...우리나라 설화에 나오는 아담한 시골마을 연상
'달밤의 매화'...음의 기운 충만한 달밤, 풍부한 시적 정서에 낭만적 서정에 도취
'대나무와 매화'...갈색과 수묵의 검정색 기운들이 뭉쳐 조선화 본연의 빛깔 보석처럼 반짝여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옛 고향마을' (40호 1980년)
'옛 고향마을' (40호 1980년)

▲옛 고향마을

김린권의 유화 작품에는 영롱한 이슬이 맺혀 있고 은빛이 청초하게 퍼져 있다. 은은한 색감과 평온한 배경 위에서 등장하는 피사체들은 차분한 기분을 안겨주고 이상향에 대한 동경심을 심어준다. 일견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색채와 표현력에서 대가다운 기풍이 묻어난다.

맑고 부드러운 기운이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배경에 자리잡고 있으나, 화풍이 결코 가볍거나 흔한 풍경이 한 점도 보이지 않다. 1965년에 조선화 최고의 대가인 정종여와 2인전을 국가 차원에서 개최할 정도이고 보면, 가히 그의 실력과 위상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자신의 풍경화 대표작으로 후에 같은 구도의 여러 작품을 남겼다. 평화로운 농가에서 아낙이 빨래를 하고 있고 맞은편 수양버들 아래에서는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으면서 그늘이 주는 시원한 안식을 즐기고 있다.

수양버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수변 풍치수로서 물가 풍경의 운치를 더해주는 주요한 소재가 되어 마치 여인의 흐느적거리는 기다란 머릿결을 연상시킨다. 이 그림의 소재 곳곳에서도 김린권의 은백색 색조가 하늘거리며 분위기를 정감 있고 은밀하게 휘어 감는다. 산과 개울가, 여인과 양, 노란 꽃나무와 바위들, 그리고 길가의 보랏빛 꽃잎과 잔디 등 모든 소재와 배경에서 은빛이 새어나온다.

'고향의 달밤'(20호 1996년)
'고향의 달밤'(20호 1996년)

▲고향의 달밤(20호 1996년)

이 그림은 옛날 우리나라 설화에 나오는 아담한 시골마을을 연상시킨다. 물레방아 도는 달밤은 남녀간의 사랑 고백이 싹트는 때이고 가족간에는 두런두런 모여서 야참을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그리움의 시간이다.

90년대 김린권은 조선화와 유화를 병행하여 왕성한 창작욕을 보였고, 무대미술 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연극영화의 배경 세트 그림에도 주력해야 했던 시기였다. 이렇게 연극영화의 세트 그림을 상기시키는 칠흑같은 어둠을 배경으로 한 그림은 도저히 조선화로는 적합하게 대응할 수 없는 그림이다. 유화의 중후하고 고전적인 구수한 질감이 달밤의 하늘과 잠들기 전의 한적한 마을과 더불어 달빛이 어리는 강가에 삼각축으로 가지런히 녹아들어 있다.

탈북자 분들이 고향에 대한 회상을 풀어놓는 가운데 북한 사람들은 이웃지간에 훈훈한 인정이 많이 남아 있고, 소박한 음식이라도 서로 나누어 먹는 정겨운 풍습이 있어 좋았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하곤 한다. 남한의 시골과 도시의 달동네에서는 그런 모습이 여전히 살아 있지만, 대부분 이웃지간의 정은 꽤나 메마르고 사이도 서먹서먹해서 웬만환 인사도 건너뛰며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이 만나서 대화와 언약을 할 때, 어떤 음식을 먹으면서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 음식의 고유한 맛도 그러하거니와 그 유래도 그 자리에 임하는 사람의 마음에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길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1, 2차 정상회담 때는 평양온반이 주메뉴였다고 한다.

그 온반은 온기를 불어넣는 음식이거니와 음식의 탄생과정에서도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냉기가 도는 찬음식인 평양냉면은 가위로 자르거나 이빨로 끊어먹는 음식이기에 향후 남북회담에서는 삼가는 편이 바람직하다. 평양온반은 평양냉면, 녹두지짐, 대동강숭어국과 함께 평양의 4대 음식으로 평가받는 '장국밥'의 일종인데 그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져 온다.

의경이라는 여인이 자신의 연인인 형달이라는 남자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자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면서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추운 겨울날 쌀밥에 녹두전 같은 잔치음식을 모아 여자에게 주었고, 여자는 그것에 끓은 국물을 부어 남자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렇게 여러 고명을 올리고 뜨거운 국을 식지 않게 지짐으로 덮은 다음 치마폭에 감싸 가져다준 ‘따뜻한 밥’이라는 의미에서 ‘온반’이고 지금의 평양온반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평양에서는 의경과 형달처럼 뜨겁게 사랑하며 살라는 의미를 담아 온반을 만들어 결혼식 상에 올린다고 한다. 또한 잔치를 할 때면 그 남녀처럼 신의를 지니고 화목하게 살라는 뜻에서 온반을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달밤의 매화'(320-113 연대미상)
'달밤의 매화'(320-113 연대미상)

▲달밤의 매화(320-113 연대미상)

북한의 조선화가들은 <달밤의 매화> 작품을 즐겨 그린다. 내로라하는 조선화가들은 그들의 대표작 중 하나로 달밤의 매화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김린권도 특히 만년에 이 달밤의 매화를 즐겨 그려 많은 대작들을 남겼다.

음의 기운이 충만한 달밤은 풍부한 시적 정서를 불러 일으키고 낭만적 서정에 도취하게 한다. 북한의 많은 순진한 선남선녀가 이 달밤에 달빛을 맞으며 사랑의 고백을 담백하게 늘어 놓고 청춘사업에 골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북한은 아직도 여전히 결혼 상대인 배우자감을 고르는데 부모님의 승낙이 관건이 되어 있고, 아예 부모님이 배우자감을 주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조선시대도 아니지만 부모님이 여러모로 세심하게 살피고 골라서 배우자감을 추천하는 만큼 못이기는 체하고 그 선택을 존중하고 믿고 따르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고전적인 효의 전통이 살아 남아 있고 순수한 미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달무리가 어른거리는 예술적인 밤에 백매화와 홍매화가 만발하는 시각적 환상과 진한 향기가 선율처럼 진동하는 때에 맞추어 작가는 예술적 감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런 감흥을 놓치지 않고 화선지 위에 묘사한 매화 나무와 줄기들을 승천을 위해 꿈틀거리는 용의 역동적이고 거친 몸짓으로 마음먹고 치환해 놓으면, 최고의 아름다운 밤을 수놓은 만족스러운 역작을 태동시키게 되는 것이다.

'대나무와 매화'(275-131 1996년)
'대나무와 매화'(275-131 1996년)

▲대나무와 매화(275-131 1996년)

김린권의 대나무 대작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대나무의 녹회색, 회녹색, 청록색, 회색 등의 다양하고 미려한 빛깔들은 유화가로서의 그의 색채 감각이 화선지에도 탁월하게 작동된 느낌이다. 대나무의 이러한 빛깔들은 그늘 속에서 발견되거나 땅거미가 질 무렵의 대나무 피부색이다.

그런데 대낮의 배경에서 이렇게 대나무의 본질적인 청초하고 고상한 색감들을 실감나게 표현한 점은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른 대나무의 색상 변이를 일찍이 눈여겨 파악하여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관념적인 표출이 가능했으리라.

가운데 아늑한 대나무 숲속에 둥지를 틀고 안착한 곱고 화사한 분홍 색감의 매화나무 위 참새 한쌍의 화폭은 포인트 벽지 역할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그로 인해 나무와 그에 깃들어 사는 생명의 주객간 다정함의 은유, 암수 사이 화목함의 시사, 신선한 이상향 속으로의 분위기 전환 메시지가 우물물처럼 샘솟아 흐르고 있다.

한편 대나무 잎새와 원시스러운 괴석에서 갈색과 수묵의 검정색 기운들이 뭉쳐 조선화 본연의 빛깔을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는 이 그림은 신비의 대나무 숲속에 묻힌 비장의 대나무화 명작을 은밀히 공개하는 듯하다.

김린권 화가 
김린권 화가 

◇김린권(1925~작고?)은 누구인가?

북한 화단에서 유화가로부터 조선화로 전향(?)한 화가 중 가장 성공한 화가를 손꼽으라고 한다면 리경남과 김린권을 들 수 있다. 그런데 2세대인 리경남은 조선화에 몰입한 이후 유화의 그림자도 밟은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유화에 뿌리를 보다 깊이 박은 1.5세대인 김린권은 영화 및 무대 미술분과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면서 그 분야와 맥을 잇는 유화의 기름붓도 소홀히 다루지 않고 그 감각과 기량을 유지해 나아갔다.

김린권은 선비적 기품이 물씬 풍기는 풍모로서 보면 조선화가의 인상이지만, 양복 정장과 안경을 쓴 이미지는 이지적인 서양화가로서의 인상을 짙게 남긴다. 변월룡이 교수로 재직한 러시아 레핀 미술대학 1호 국비 유학생으로서 정통 서양화를 공부하여 서양화단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냈었다.

그리고 1965년에는 조선화 스승 정종여와 함께 미술 특사로서 월남을 방문하고 그린 그림을 가지고 조선미술박물관에서 2인 전시회를 가질 정도로 유화가로서도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던 그였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의 김린권 부분을 요약하여 전한다. “함경남도 인흥군 원동리에서 출생하여 1938년부터 10년간 홍남비료 공장에서 로동하다가 1948년에 평양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후 1951년에 이전 쏘련 레닌그라드 레삔 미술대학에서 6년간 미술공부를 하였다. 1957년에 귀국하여 문화선전성 지도원을 하였고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영화 및 무대 미술분과 위원장으로 있었다.

그 후 문학예술작품 심의원으로 1994년까지 활동하였고 작고할 때까지 원로미술가들의 단체인 송화미술원에서 서기장으로 사업을 하였다. 1965년에 정종여와 함께 월남을 방문하고 그린 그림을 가지고 조선미술박물관에서 2인 전람회를 가졌다. 그의 작품 가운데 10여점이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정종여, 정창모를 비롯한 조선화 화가들의 지도 밑에 전통적인 조선화 몰골 기법을 배웠으며 1970년대 중반기 이후 화조 몰골기법들을 수많이 그려내었다. 그는 송화미술원 전시회들에 수십점의 몰골 그림들을 출품하였으며 조선화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김린권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러시아 레삔 미술대학에서 유화를 전공한 화가로서 유화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유화가들에게도 조선화 분야를 배우도록 권장하던 시기인 70년대에 조선화를 적극적으로 배워 향후 이 분야에도 일가를 이룬 화가이다.

일부 유화가들은 자신의 전공인 유화에 전념하지 못한 것이 발단이 되어, 그 이후 자신만의 개성과 추진력을 잃어버리고 점차 화단의 중앙 무대에서 밀려나는 운명을 겪게 되는데 반해, 김린권은 비교적 장수하면서 양 분야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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