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망치라는 별명으로도 통하는 중국 배구의 국보이자 전설인 랑핑 전 여자 국가대표 팀 감독. 고위급 정치인으로 변신할 것으로도 전망되고 있다.[사진제공=런민르바오]
쇠망치라는 별명으로도 통하는 중국 배구의 국보이자 전설인 랑핑 전 여자 국가대표 팀 감독. 고위급 정치인으로 변신할 것으로도 전망되고 있다.[사진제공=런민르바오]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라는 스포츠계의 오랜 격언이 있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진리인 것을 보면 정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중국 배구계의 국보로 불리는 한 사람에게 만큼은 이 격언은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바로 여자배구 대표 팀의 총감독을 지낸 랑핑(郞平. 63) 중국배구협회 부회장이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금메달을 따면서 이른바 트리플크라운 신화를 쓴 후 지도자가 돼서도 그야말로 눈부신 대성공을 거뒀다면 진짜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앞으로 다시 나오기 힘들 중국 스포츠계의 전설로도 통하는 그녀는 톈진(天津) 출신으로 어릴 때는 운동과는 거리가 무척이나 멀었다. 집안이 운동을 하기에는 너무 가난한데다 몸도 허약한 탓이었다. 어머니가 항상 좁쌀죽으로 영양을 보충시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면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지 않나 싶다. 이렇게 어려웠던 집안 사정은 결국 1967년 그녀의 부모를 베이징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수도가 톈진보다는 먹고 살기에 더 조건이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얘기가 될 듯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예상대로 베이징에서 집안 경제가 다소 나아진 것이다. 그녀의 몸도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베이징 노동자체육관에서 배구를 처음 접하게도 됐다. 동년배에 비해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배구에 입문했으나 발전은 엄청나게 빨랐다. 중학 1학년 때 베이징 제2체육운동학교 배구부 주전 선수가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1년 후 베이징 여자배구 팀에 당당하게 들어간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국가대표도 18세의 어린 나이에 되는 기염 역시 토했다. 184센티의 키가 어필했던 때문인지 곧바로 주전 자리도 꿰찰 수 있었다. 21세 때인 1981년에는 중국의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에 일조도 할 수 있었다. 이때 톄랑터우(鐵榔頭. 쇠망치)라는 별명을 가진 무시무시한 선수답게 최우수선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완전히 세계를 휩쓸었다. 올림픽을 비롯해 우승을 못하는 대회가 있는 것이 이상했을 정도였다. 이때가 중국 여자 배구의 최전성기였다는 얘기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녀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제패 기념우표의 주인공이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진 그녀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25세 때 은퇴를 결심하고 공부로 눈을 돌렸다. 어렵지 않게 베이징사범대학 영어과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공부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가볍게 졸업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공부를 마친 1989년 지도자로 바로 현장으로 돌아왔다. 한창 선수로 뛰어도 될 나이인 29세 때였다. 처음 맡은 팀은 이탈리아의 모디나 클럽으로 팀 역사상 최연소 감독이 되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보 지도자로서의 성적은 상당히 좋았다. 팀을 1989년 이탈리아배 챔피언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1990년 국내로 유턴한 그녀는 바로 국가대표 팀의 코치로 데뷔한다. 그러나 전설의 이 시기 성적은 사상 최악이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제11회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에서조차 우승을 못했다면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처음 맛본 좌절에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다시 돌파구를 찾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떠난 것은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그녀는 뉴멕시코대학 여자 배구 팀을 지도했다. 다시 전설의 성적이라고 할 만한 기록도 남겼다. 팀을 미국 동부지구 대회의 우승으로 견인한 것이다.

35세 때인 1995년 그녀는 다시 귀국을 결심하는 일생일대의 용단을 내렸다. 4년 동안이나 정들었던 미국을 떠나 당당하게 컴백한 그녀에게 기다린 것은 당연히 대표 팀 감독 자리였다. 4년 동안 지도자로서 거둔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우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다음 해에는 아시아선수권 우승이라는 업적도 이뤄냈다. 또 1998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과 제13회 아시안게임 우승의 성과도 올렸다.

이후 그녀는 다시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05년에는 미국 국가대표 팀의 감독이 되는 기적도 연출하기까지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팀에 은메달도 선사했다.

2013년 그녀는 다시 중국 대표 팀의 감독을 맡아 3년 후 리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감격까지 맛본다. 선수와 지도자로서 공히 올림픽 챔피언이 된 것이다.

그녀가 두 번째 중국 대표 팀을 맡은 8년 동안 올린 성적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다. 한 차례 올림픽 금메달, 두 차례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의 성적만 놓고 봐도 좋다. 2021년 9월 1일 감독직을 내려놓고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이로 보면 하나 아쉬울 것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현재 그녀는 고향인 톈진 소재의 중국배구학원 원장으로도 일하고 있다. 현장을 떠나 후진 양성에 눈을 돌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다시 일선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크다. 배구협회 회장 자리도 본인이 원하면 앉을 수 있다.

정치적인 야심을 현실로 옮기지 말라는 법도 없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국회에 해당) 부위원장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에 여러 차례 휩싸인 것은 분명 괜한 게 아니라고 해야 한다. 리더십과 능력도 뛰어난 만큼 시켜주면 상당한 성과를 낼 것으로도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출신의 스포츠 평론가 왕다자오(汪大昭) 씨의 설명을 들어봐야 할 것 같다.

“랑핑 감독이 선수나 지도자 시절 보여준 지도력은 정말 뛰어났다. 이런 인물은 정치적으로도 크게 기여를 해야 한다. 본인이 정 고사한다면 모르겠으나 당국에서 배려를 할 경우 적극 나서야 한다.”

왕 씨의 말에서 보듯 중국 스포츠계에서 최근 정치인 랑핑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얘기가 도는 것은 전혀 의외의 일은 아니다. 쇠망치라는 별명이 중국 정치권에서도 통할 날이 이제 머지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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