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바로 국민이다'는 동독 주민의 외침, 마침내 베를린 장벽 무너뜨려

'베를린 장벽 붕괴 32주년'인 2021년 11월 9일 독일 베를린의 베르나우어 거리에 있는 기념관에서 학생들이 철거되지 않은 장벽 틈에 꽃을 꽂고 있다. [사진=베를린 AP/연합뉴스]
'베를린 장벽 붕괴 32주년'인 2021년 11월 9일 독일 베를린의 베르나우어 거리에 있는 기념관에서 학생들이 철거되지 않은 장벽 틈에 꽃을 꽂고 있다. [사진=베를린 AP/연합뉴스]

【뉴스퀘스트=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1989년 11월 9일 콘크리트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왜 동독공산당은 장벽을 열 수밖에 없었을까?

동독 주민의 결단과 행동이 주된 동력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리고(Jericho) 성’처럼 베를린장벽에서 동독 주민의 외침 “우리가 바로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가 나팔소리가 되었다. 40년 동안 공산독재를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이것은 아니다”라 판단했다. 피를 흘리고 끌려가면서도 자유를 향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공산당이 아니었다. 권력을 결단코 놓기 원하지 않았던 정치국원들이 머리 굴렸다, 한 놈만 희생양으로 던져주자. 10월 17일 ‘궁정 쿠데타’로 당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를 잡았다. 목을 비튼 중심은 그가 후계자로 키운 황태자 에곤 크렌츠였고, 그가 후계자가 되었다. 지난 칼럼(10월 17일) “김정은 위원장 안녕하신가?... 34년 전 10월 18일, 동독 독재자 호네커가 쫓겨났다”에서 살펴본 바다.

생존을 위한 공산당의 발버둥이 시작됐다. 국가 부도 상태에 내몰렸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크렌츠, 서독에 손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서독 지도자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우리에 주는 무게 있는 울림을 위해 상세히 적어본다.

10월 24일, 알렉산더 샬크-골로드코프스키를 서독의 수도 본에 급파했다. 대외무역부 차관이 공식 직함이었지만 실제 그는 비밀경찰 슈타지(Stasi) 소속으로 동독 외화벌이기관 ‘상업조정회’(KoKo) 책임자였다. 북한 ‘노동당 39호실’과 같은 성격이다.

동독 최고의 외환 조달가답게 그는 예술 작품의 서방 판매는 물론이고 마약과 무기 밀매도 서슴지 않았다. 그 돈으로 당정치국에 서방 제품을 공급해 신망이 대단했다. 80년대 초 경제 위기 때 1983년 서독을 찾아 10억 달러 차관을 얻어낸 바 있다.

서독길에 오른 그는 착잡했다. 지금의 동독 경제난을 그만큼 더 잘 아는 이가 없었다. 당정치국 국가계획위원회가 위원장 게르하르트 쉬러의 지휘로 작성한 ‘동독 경제상황 분석’, 일명 ‘쉬러 보고서’에 함께 참여했기 때문이다. 동독이 거의 파산했으며, 국가부채를 줄이고 과감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생활수준이 30% 감소할 것이란 충격적 분석을 담고 있었다.

골로드코프스키는 서독의 루돌프 자이터스 수상청장관과 볼프강 쇼이블레 내무장관에게 5억 DM(서독마르크)을 요구했다. 서독과 서베를린 연결을 위해 동독 땅에서 움직이는 서독연방철도 지원에 추가비용이 발생했다는 이유였다.

그의 창의적이고 뻔뻔한 논리는 이미 박사학위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슈타지 수장 에리히 밀케가 직접 지도한 논문에서 그는 동독이 서독에 850억 DM 이상의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장벽 건설 이전에 동독 주민의 대량 서독 탈출로 인한 경제적 피해란 것이다.

당시 동독 주민 시위의 주요 요구 중 하나가 여행의 자유였다. 동독은 만약 주민의 서독 방문을 허용하기 위해 새로운 여행 규정을 도입한다면, 서독이 그에 소요되는 자금 200억 DM을 기여해야 할 것이라 주장하기까지 했다. 서독은 청취만 하고 골로드코프스키를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10월 26일, 헬무트 콜 수상이 동독의 새 실력자 크렌츠에 직접 전화했다. 14분이나 걸린 첫 통화에서 크렌츠는 두 독일국가 간 관계 개선 등을 떠벌렸지만, 콜은 진솔하게 핵심을 찔렀다. 여행 자유 허용, 체포된 시위대 석방, 유죄 판결을 받은 탈출자 사면 등을 요구했다.

‘음, 음’ 머뭇거리던 크렌츠는 크리스마스 전 새로운 여행법 발표를 약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서독의 ‘동독 시민권에 대한 명확한 존중’을 요구했다. 전임 호네커도 줄기차게 요구한, 동독국가에 대한 공식 인정을 의미하면서 동독이 주장한 2국가에 입각한 분단을 기정사실화 해주는 요구에 콜은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제가 당신의 전임자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 업무에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됐다고 믿습니다. 우리 관계에는 근본적으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며 결코 동의하지 않을 근본적인 질문이 많이 있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계속 얘기하고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않거나, 아니면 서로의 견해를 존중하고 현명하게 함께 일할 수 있는 협력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크렌츠의 입을 막은 콜은 정상 간 ‘핫 라인’ 개설을 이끌어냈다. 두 사람 간 긴밀한 대화의 필요성을 콜은 노련하게 미국의 부시나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아니라, 소련 고르바초프와 자신과의 사례를 들어 크렌츠를 압박했다.

10월 30일, 우울한 ‘쉬러 보고서’가 당정치국에 공식 제출되었다. 개혁 제안과 함께 동독의 지불능력 보장을 위해 서독으로부터 20~30억 DM 규모의 긴급 차관 협상이 필수적이라 담겼다. 동서독 간 균형을 위해 서독 견제에 관심을 가진 프랑스, ​​오스트리아, 일본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과도 건설적인 협력 개념을 개발해 협상할 것도 보고되었다.

11월 1일, 다급한 크렌츠는 모스크바를 찾았다. 고르바초프에게 경제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재정난 타개를 위한 긴급 지원을 부탁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상황도 어렵다, 동독 주민도 처한 경제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 점차적으로 모든 진실을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차관을 거절했다.

11월 4일로 동독 주민이 예고한 대규모 시위(실제 동독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체제 시위로 50만 명이 동베를린 알렉산더광장에 모였다)를 앞두고 그들의 요구·행태와 관련해서도 “반사회주의와 범죄적 요소가 있음은 하나의 일면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민을 적으로 볼 수는 없다. 만약 그들이 정치에 반기를 든다면 정치에서 무엇을 바꿔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인민의 이익과 사회주의에 부합한다. 그런 운동이 바리케이드 반대편에 서지 않도록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당은 그런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 되고, 이러한 세력과 협력해야 한다”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11월 6일, 골로드코프스키는 다시 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자이터스와 쇼이블레를 만나 자유로운 선거, 여행의 광범위한 변화 가능성 등 정치개혁 의지를 밝히면서 파멸적인 동독 경제를 위해 수십억 DM을 요청했다.

자이터스와 쇼이블레는 약속을 유보하면서 혹을 더 붙였다. 동독 주민의 서방 자유여행에 더해 서독 주민의 동독 여행 활성화도 중요하다며,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할 때 의무로 부과받는 ‘강제환전’(Zwangsumtausch) 폐지를 요구했다.

‘최소환전’(Mindestumtausch)이라고도 하는 이 규정에 따라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할 때 일정 금액의 서독화폐 DM을 동독마르크 M으로, 동독이 정한 환율 1대1로 교환해야만 했다. 당시 최소 환전금액은 1인 25DM으로, 서독인은 공식 환율이 1대4인 상황에서 100M이 아니라 25M만 받았고, 나머지 75M은 동독이 차지했다.

역시 11월 6일, 동독공산당은 기관지 ‘신독일’(Neues Deutschland)에 새로운 여행법 초안을 발표했다. 서독 보여주기이자, 동독 주민 간보기였다. 12월부터 1인당 연간 30일간의 해외 휴가와 15M의 여행경비를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번져가는 들불에 폭풍을 불어준 격이 되었다. 365일 여행이 가능한 ‘제한 없는 여행법’과 자유·개혁을 요구하는 함성이 동독 전역에 울려 퍼졌다.

11월 8일, 콜은 연방의회 연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나는 새로운 동독공산당 지도부가 개혁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변화의 길을 지지하겠다는 의지를 선언합니다”, 화장하는 듯 외관상 교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는 동독 정치상황의 근본적인 개혁이 구속력을 갖게 확실히 된다면 포괄적인 도움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동독공산당은 권력 독점을 포기하고, 독립 정당을 허용하며, 자유선거를 구속력 있게 보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나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경제지원에 대해서도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11월 9일 오후, 마침내 동독공산당은 동독 주민의 자유여행, 동독 방문자를 위한 새로운 규정을 의결할 수밖에 없었다. 6시 45분경 정치국원 귄터 샤보프스키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자단 앞에 나타났다.

새로운 여행 규정이 언제 발효될 것인지 한 서방특파원이 묻자 샤보프스키는 ‘즉시’라고 엉겁결에 말했다. 원래 다음날 오전 국가통신 ADN을 통해 발표된 후 효력을 가지도록 한 정치국회의에 사정으로 참석치 못한 그가 자세히 전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기자들이 달려가 여행 자유화를 타전하기 시작했고, 곧 전 세계에 알려졌다. 서방의 언론·방송을 접한 동베를린 시민들은 장벽으로 달려갔다. 실랑이가 벌어졌고, 상부로부터 어떠한 새로운 지침도 받지 못한 국경수비대와 유혈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8시 30분, 본의 연방의회에도 구체적 소식이 날아들었다. 연방의원들은 회의를 멈추고,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9시 20분, 보른홀머거리 베를린장벽 통과문이 최초로 열렸다. 자정 무렵 동서베를린 간 모든 통과지점이 개방되었고, 동서 주민들이 얼싸안았다.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장벽과 함께 독재와 폭정, 억압과 통제가 무너져 내렸다. 주연 동독 주민, 조연 서독 국가지도자, 합작 드라마의 승리였다.

10월 17일 쫓겨나면서 호네커가 내뱉은 마지막 넋두리, “자신의 교체로 과연 동독 내부 문제가 진정될 것인가, 사람을 바꾸는 것은 ‘협박이 통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줄 뿐이고 상대는 이를 이용해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가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통일행 열차가 막 기적을 울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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