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도 연말에는 편안한 안식의 시간이...

KBS 유머일번지 방송화면. [사진=KBS COMEDY 유튜브 캡쳐]
KBS 유머일번지 방송화면. [사진=KBS COMEDY 유튜브 캡쳐]

【뉴스퀘스트=권태오 예비역 육군 중장 】 매년 이맘때가 되면 병영에도 편안한 안식의 시간이 돌아온다.

주로 가을철에 집중되었던 야외훈련을 마치고 사용했던 장비와 물자를 정비하고 겨울나기를 위해 병영시설도 보수하면서 오랜만에 장병들이 함께 모여 나름대로 오붓한 시간을 갖는 시기이다. 이 무렵의 병영을 회상해 보면 우리에겐 세 가지의 추억이 남아있다. 

김장, 페치카, 크리스마스 트리이다.

지금은 김치를 사시사철 구입해서 먹고 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각 부대는 자체에서 김장을 하였다. 연 초에 부대에서 계약한 밭으로 가서 배추를 뽑아 트럭으로 실어 온 다음에 깨끗한 물에 씻어 소금에 절이고 배추 속을 만드는 준비를 마치고 나면 간부 부인들까지 모두 부대에 들어와서 함께 김치 속을 버무려 넣고 차곡차곡 준비된 김장 탱크에 저장을 한다.

장병들은 응달진 곳에 여러 개의 구덩이를 파서 겨우내 먹을 무를 넣은 다음 저장무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짚을 꼬아 숨구멍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각각의 구덩이 곁에는 개봉해서 먹는 기간이 표시된 푯말을 꽂아서 계획성 있게 급식되도록 신경을 쓴다.

이렇게 진행되는 ‘김장작전’하는 날은 온 부대가 들떠서 움직이는 날이었다. 돼지고기를 삶아 편육을 만들고 갓담은 겉절이를 따끈한 밥에 얹어 먹을 수 있는 이 날은 그야말로 집 떠난 장병들이 마음껏 고향향수를 느껴볼 수 있는 날이기도 하였다.

페치카로 불리는 벽난로는 전방지역 병영의 유일한 난방 수단이었다. 각 내무반(지금은 생활관으로 부름)마다 두 개씩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낭만적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나무 때는 벽난로가 아니라 건물 바깥의 화로에서 분탄과 진흙을 섞고 이것을 얇게 펴서 불판 위에 놓고 서서히 타는 열로 내무반을 데워주는 것이었다.

페치카 위에는 드럼통을 잘라 만든 물통을 얹어 더운 물도 쓸 수 있도록 준비를 한다. 시월이 되면 각 부대는 생활관별로 난방을 책임지는 빼당(페치카 당번)을 선발했고 부대별로 집체교육을 하여 적당히 불 꺼뜨리지 않고 난방하는 요령과 화재예방, 일산화탄소 중독예방과 같은 안전교육을 하였다.

뻬당으로 선발된 병사는 겨우내 제대로 잠도 못자며 난방이 꺼지지 않도록 불 관리를 해야 했으며 전신이 분탄가루로 새까맣게 된 옷을 입고 열심히 봉사를 하였다.

가끔 고참들이 요구하는 라면을 끓여주고 얻어먹는 재미도 있었지만 공식적인 보상은 불침번과 혹한기훈련 면제, 봄이 되었을 때 받는 포상휴가가 전부였다. 중간에 그만 두고 싶은 생각도 많았지만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경계근무 다녀온 병사들이 던져주는 “야! 따뜻하다. 뻬당 고마워.”라는 한마디가 ‘군불 절대사수’ 과업을 수행한다는 보람을 주었고 겨우내 열심히 뛰게 되는 에너지가 되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12월이 시작되면 모든 내무반에 설치가 되었다. 인근 산에서 작은 전나무를 베어다가 화분에 꽂고 그 위에 솜과 각종 장식을 붙이고 반짝이는 등을 달았다.

어떤 부대는 연병장 옆 큰 소나무에 이런 장식을 하여 조금이라도 연말을 맞은 병영의 삭막함을 없애보려 하였다. 내무반에서는 트리와 함께 여자 친구 사진 콘테스트도 벌어지고 누가 가장 예쁘고 정성스런 크리스마스카드를 받는가를 심사하여 크리스마스이브 날 시상을 하는 이벤트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간부들은 이런 과정에서도 어떤 병사가 가정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마음에 벽을 쌓고 있으며 친한 친구 한명 없이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권태오 예비역 육군 중장
권태오 예비역 육군 중장

그리고 그런 병사에게 좀 더 다가가고 보듬어주며 친해져서 어떻게 해서라도 마음을 열도록 하고 세상에 너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려 했다. 병영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 모두가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형제이며 비록 태어난 날은 다르더라도 죽는 날은 같을 수 있다.’라는 전우애를 키워나갔던 것이다.

휴대폰으로 쉽게 한 줄 보내는 것으로 연말 인사를 가름하고 일과시간 이후에는 개인 자유시간을 보장하여 일체 간섭하는 일이 없다고 자랑하는 지금이 병영에선 가히 연상할 수 없는 선배 전우들의 쌍팔 년도 군대생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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