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 접경지역에 감시·통제망 새로 구축
험한 꼴 보고도 동독 좇아가는 김정은
호네커 베를린장벽 100년 장담 했지만 장벽과 함께 사라져

【뉴스퀘스트=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 김정은이 동독 길을 따라가고 있다. 사회주의 맹방 동독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김정은이다.

3월 7일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2018~2023년 간 북·중 접경지역에 감시·통제망을 새로이 구축했다. 인구 집중지역에는 2중 3중의 철책을 세웠고, 경비초소·망루·주둔지 등을 대거 추가해 경비건물이 20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지난해 5월 필자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여서 중국으로부터의 밀입북자를 통제하기 위해, 북·중 접경지역을 무시로 출입하는 중국인이 너무 많아 약 1,300㎞를 꽁꽁 묶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고서 제목 <총알보다 더 강한 공포감, 2018~2023년 북한 폐쇄>가 그 목적을 말해준다.

주장대로 “국가비상방역체제를 더욱 엄격히 유지·강화”하기 위해서였다면, 팬데믹이 지나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유로운 입·출입을 허용하는 지금 김정은은 철조망 봉쇄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

북한 사회안전성은 북·중 국경봉쇄를 강화하면서 내린 포고문 “북부국경봉쇄작전에 저해를 주는 행위를 하지 말데 대하여(2020.08.25)”를 통해 국경봉쇄선으로부터 1~2㎞의 완충지대를 설정하고, 완충지대에 무단으로 출입하거나, 도로·철길의 국경차단물에 접근하거나, 압록강·두만강의 북한쪽 강변에 침입하면 짐승은 물론이고 사람도 무조건, 예고 없이 사살한다고 못 박았다.

◆ 1961.08.13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1945년 전쟁에 진 독일은 동서로 분할되고 베를린도 동서로 두 동강났다. 1949년 동독이 세워지자마자 동쪽 땅과 동베를린에서 1당 독재체제 구축, 인권 탄압, 사유재산 몰수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서독으로 넘어왔고, 그 수가 1952년까지 67만5000명에 달했다.

1952년 5월 26일 동독은 동서독 접경선에 철조망, 감시탑 등 방비시설의 설치를 시작했고, 접경지 주민들을 배후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럼에도 1961년까지 탈출자는 당시 동독 인구의 1/6인 270만명에 달했다. 대부분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온 것이었다. 통제는 되었으나 그래도 그때까지 동서 왕래가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었다.

1961년 8월 13일,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졌다. 베를린을 시작으로 동독은 동서독 전 접경선에서의 통행을 완전히 차단했다.

동독 국방성은 1961년 10월 6일 극비로 동독 국경선의 불가침성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키고 동독 주권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총기사용을 허가한다는 사살명령서를 내렸다. 명령서에는 “독일민주공화국을 탈출하는 자를 말살(vernichten)하는 것이 국경수비대의 의무”라 명시되었다. 동독은 이 서한의 존재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 사회안전성의 북부국경봉쇄 포고문과 동독 국방성의 국경선 사살명령서 [사진:=조선일보/손기웅]
북한 사회안전성의 북부국경봉쇄 포고문과 동독 국방성의 국경선 사살명령서 [사진:=조선일보/손기웅]

동독은 약 1,400㎞의 접경선 전역에 걸쳐 전기철조망, 지뢰밭, 감시탑과 벙커, 자동발사장치, 군견, 차량방벽, 콘크리트장벽으로 5중 6중의 요새를 구축했다. 폭 5㎞의 통제지대도 설정했다. 주민이 방비시설을 보지 못하도록, 탈출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또 하나의 차단 장벽도 세웠다. 수많은 통한(痛恨)의 현장이 되었고, 28년이나 이어졌다.

◆귄터 리트핀, 페터 페흐터, 크리스 괴프로이

1961년 8월 24일, 24세 동독 청년 리트핀이 동서베를린 사이의 강에 뛰어들었다. 강변 서쪽에 닫기 직전 그는 3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준 사격에 의해 사살되었다. 베를린장벽 구축 11일 만에 일어난 최초의 희생자였다.

1962년 8월 17일, 동베를린 건설노동자 18세 페흐터는 친구 헬무트 쿨바이크와 함께 장벽을 넘으려다 총알 세례를 받았다. 쿨바이크는 성공했지만, 페흐터는 서쪽 담벼락 바로 앞에 쓰러졌다. 담 위 서독 주민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를 위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직후 동독은 “장벽을 넘으려는 누구도 피와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라 호언했다.

당시 우연히 현장에 있었던 카메라맨 헤르베르트 에른스트는 상황을 필름에 생생히 담았다. 1분짜리 영상은 전 세계에 냉전의 비극을 가장 충격적으로 증언했다. 1972년 스페인 가수 니노 브라보는 페흐터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유’(Libre)를 발표했다. 영상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어떠한 통제도 장애물도 자유를 향한 동독 주민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터널을 파서, 장바구니·전축·스피커·자동차에 숨어서, 아예 버스로 돌진해서 서베를린으로 자유를 찾고자 했다.

마지막 희생은 1989년 2월 5일이었다. 20세 웨이터이자 체조선수였던 괴프로이는 체조세계챔피언, 자유로운 삶, 미국 여행이라는 세 가지 꿈을 가졌다. 친구 크리스티안 과디안과 함께 한 탈출은 거의 성공할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총격을 받아 괴프로이는 즉사했다. 과디안은 총을 맞은 채 체포되기 직전에 여권을 벽 서쪽으로 던져 사건과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9개월 후 베를린장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해 1월 동독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베를린장벽이 앞으로 100년 더 서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몇 달 뒤 장벽과 함께 자신도 사라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베를린장벽에서만 최대 445명이 살해되었고, 7만1천여명이 투옥되었다.

◆ 미하엘 가르텐쉬래거, 하인쯔-요셉 그로쎄

1,400㎞에 달하는 동서독 접경선에서도 자유를 향한 탈출은 끊이지 않았다. 1970년부터 동독이 접경철책장벽의 동독쪽 면에 설치한 자동발사장치는 ‘산탄지뢰 70형(Splittermine Modell-70)’ 혹은 ‘자동발사장치 70형(Selbstschussanlage Modell-70)’으로 SM-70이라 한다.

‘죽음의 자동기계(Todesautomat)’라 불렸던 SM-70의 촉발선을 건드리면 전기가 흐르고 약 100g의 TNT가 폭발하면서 110여 개의 쇳조각 탄환이 날아간다. 사정거리 120m인 살인기계를 동독은 30m 간격으로 삼중으로 설치해 ‘공화국 탈출자’를 벌집이 되도록 했다. 동독은 살인 장치는 물론이고 사살 사망자를 인정도 공개도 하지 않았다.

1944년 동베를린 근교에서 태어난 가르텐쉬래거는 동독이 1961년 베를린장벽을 세우고 전 접경지역을 요새화하자 17세의 나이에 친구들과 함께 반대 시위를 하다 정치범이 되어 무기징역으로 구금되었다. 10년간 독방에서 고통 받던 그는 1971년 ‘자유거래(Freikauf)’를 통해 서독으로 와 고대하던 자유를 찾았다. 동독은 4만DM(서독마르크)를 챙겼다.

새 삶을 시작했지만 그는 동쪽의 동포를 잊지 않았다. 31명의 탈출을 도와주었고, 6명을 직접 서독으로 데려왔다. 동독 독재체제에 대한 항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비인간적인 SM-70을 직접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1976년 3월 30일 가르텐쉬래거는 접경선에 접근해 SM-70의 촉발선과 전기접전단자 연결선을 절단해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 4월 23일 두 번째도 성공이었고, 서독 시사주간지 ‘슈피겔(Spiegel)’이 이를 보도했다.

살인기계 설치를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동독은 4월 24일 비밀경찰 ‘슈타지(Stasi)’ 요원 29명으로 특공대를 조직했다. 4월 30일 프리스터카테 인근 접경선에서 세 번째 해체를 시도하던 미하엘은 사살되었다.

가르텐쉬래거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사건을 계기로 살인자동장치의 작동 원리와 해체 방법이 언론에 상세히 알려지자 격발을 피한 탈출이 멈추지 않았다.

사망 직전 접경선 서독쪽에서 동독을 바라보는 가르텐쉬래거, 오른쪽 화살표가 사살된 곳이다.[사진=손기웅]
사망 직전 접경선 서독쪽에서 동독을 바라보는 가르텐쉬래거, 오른쪽 화살표가 사살된 곳이다.[사진=손기웅]

우리의 GOP에 해당하는 동독 국경군 주둔지 발하우젠에서 일하던 그로쎄는 굴착기 운전수였다. 1982년 3월 29일 철조망장벽 동독쪽 안 순찰로를 정리하던 그는 기회를 노렸다. 두 명의 감시병이 잠시 소홀한 틈을 타 순찰로를 따라 움직이던 굴착기를 순간 철조망장벽으로 몰면서 굴착기 손을 길게 뻗었다. 굴착기 손이 장벽 너머 걸쳐지자 그로쎄는 굴착기 손을 타고 단숨에 철조망을 넘고 언덕 위 자유를 향해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눈치 챈 감시병의 총구가 불을 뿜고 그로쎄는 즉사했다.

당시 공화국 탈출자의 말로를 보여주는 상징적 선전물이었던 굴착기는 이제 자유에의 의지를 증언하는 상징이 되었다.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잘 관리되고 있다.

◆ 5609, 913, 180

동독의 봉쇄에 바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동독은 1963년부터 서독과 접하는 동해 해안을 따라 콘크리트감시탑을 세웠다. 높이 11m, 직경 1.4m 기둥 위에 높이 2.74m의 8각 감시벙커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꽉 막힌 육상보다 그나마 장벽이 없는 동해가 동독 주민에게 새로운 탈출길로 떠올랐다. 고무침대, 카누, 직접 만든 수영기구나 잠수정 등을 이용하거나 혹은 오로지 자신의 육체에 의존해 자유를 찾아야 했다. 서독과 가장 가까운 퀼룽스보른부터 짧게는 25㎞ 멀게는 40㎞ 이상을 의지 하나로 견뎌야 했다.

동독 각지에서 퀼룽스보른을 찾아 탈출을 시도한 5,609명 가운데 단지 913명만이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약 180명이 목숨을 잃었다. 확인되지 않은 시도와 희생이 얼마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기다린 곳은 차디찬 감방이었다.

서독 언론은 탈출자, 특히 성공한 사람들의 사연을 상세히 소개하고 자유를 향한 그들의 용기와 의지를 집중 조명했다. 한편 동독은 그들이 서독에 의해 유인·납치당했다고, 서독군이 해양국경선을 침범하고 테러를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 너희가 자유를 아느냐

독일민주공화국, 일명 동독에서 사라진 민주주의와 인민, 그 체제에 눈 떴을 뿐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결단하고 몸을 일으킨 용기, 동독 독재체제의 멸망과 통일의 길을 연 동력이었다.

희생된 모든 동독 주민의 명복을 빈다. 이제는 별이 된 이들이 하늘에서 한반도 북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김정은 독재체제가 1961년의 동독이 되고 있다. 그 통제와 봉쇄에도 압록강과 두만강에 뛰어들고 거센 파도에 몸을 맡기는 북한 주민의 자유에의 의지는 꺾이지 않고 있다, 꺾이지 않을 것이다.

수천㎞의 고통길을 자유에의 희망으로 견뎌 이 땅에 올 수 있었던 동포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올 수 없었던 동포들의 명복을 빈다.

김정은에게, 그 추종자들에 묻는다, “너희가 자유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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