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트 서독 수상은 동독 주민들에 감동을 줬고 문 대통령은 북한 주민들로부터 감동을 받고 왔다...

【뉴스퀘스트=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 “브란트가 온다!”

1970년 3월 19일 최초의 독·독 정상회담이 열렸던 동독 에르푸르트(Erfurt),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독 총리 빌리 슈토프(Willi Stoph)와 회담할 서쪽의 귀빈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서독 수상이 도착할 기차역에는 물론이고, 회담장소인 ‘호텔 에르푸르트 호프’ 광장에도 구름같이 운집한 인파와 동독 보안요원 간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분단 이래 처음 하는 정상회담, 개최 장소가 쟁점이었다. 1949년 동서독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한 뒤에도 전승4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동·서베를린 전체가 전승4국의 권한 아래에 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동독이 이를 거부하고 동베를린을 동독의 수도로 명확히 밝혔으나, 서방연합국(미·영·프)과 서독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 외무성이 동베를린을 정상회담 장소로 제안했다. 다만 도로·철도가 아니라 항공로 이용 방문이었다.

동독은 서독 최고권력자가 승용차·기차로 동독을 통과해 서베를린을 거쳐 동베를린으로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서독 수상이 육로로 동독을 통과해 행진하는 것이 서독이 주장하는 ‘전독일단일대표성’을 과시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고, 육로로 서베를린에 오는 것이 ‘서독과 서베를린 간 특수 관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베를린을 집어삼키기 위해 ‘베를린봉쇄’(1948.06.24~1949.05.12)를 감행했던 소련과 동독이었다.

또한 서독 대표단 일행이 동독 지역을 육로로 긴 시간 통과하는 과정에서 동독 주민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동독은 비행기로 동베를린의 쇠네펠트공항(통일 후 현 베를린공항)에 브란트가 곧바로 오기를 원했다.

서독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서독을 대표하는 수상이 동독 총리를 만나러 동베를린에 갈 수는 없었다. 동베를린을 동독의 수도로, 동베를린을 동독의 영토로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독이 동베를린을 거부한 상황에서 동독 총리도 서독의 수도로 올 수는 없었다. 따라서 본(Bonn)도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안이 서독 수상이 동독의 에르푸르트를 방문해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에르푸르트는 동서독 접경지인 동독 튀링겐주 주도이자 독일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회담 하루 전 서독 국가정보원(BND)은 특급기밀을 입수해 서독 내각에 전달했다. 동독 공산당이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비밀리에 실시한 주민 대상 여론조사 결과였다. “동독이 당신의 조국인가?”란 질문에 70%의 노동자가 “아니다”, “‘독일’이 나의 조국이다”라고 응답했다.

큰 충격을 받은 동독 지도부 사이에 정상회담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국가수반이자 당서기장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의 경쟁자였던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반대했다는 내용이었다.

회담 당일, 브란트 수상이 에르푸르트로 달려가는 열차로 서독 BND가 정상회담 개최장소의 분위기를 시시각각으로 송신했다. '시간이 갈수록 동독 주민들의 흥분이 높아간다, 분명 무엇인가 일어날 것이다, 이를 통제하기 위한 동독 공산당의 선전과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독 당국이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동독의 자랑 ‘라이프치히 박람회(Leipziger Messe)’에서 늘 하던 대로 역과 회담장소 인근의 모든 창문·거리·상점에 공산당과 동독을 찬양하는 문구로 장식했다. 호텔 광장에도 동원된 인력으로 가득 차도록 했다. 선동가 1,000명을 선별·배치해 군중들이 모이면 체제 옹위 선전·선동도 계획했다.

서독 수상이 박수를 받거나 환호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지침도 하달했다. 물론 의례적으로 서독 수상을 환영하고 환호하는 군중들도 마련했고, 이를 위해 학생들이 동원되어 에르푸르트로 향했다.

브란트 수상은 마지막 순간까지 동독 주민들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늠하지 못했다. 조직된 공산당원들의 행진과 동독 청소년들의 친정부 시위?, 아니면 자신에 대한 환영의 환호?, 집결한 군중들 속에서 슈토프 총리 찬양구호들이 터져 나오게 계획했을지도 모른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러나 브란트의 에르푸르트역 도착 30분 전부터 동독이 친 차단막을 넘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역을 가득 메웠다. 군중들이 역 쪽을 보지 못하도록 동독 당국이 전차로 시야를 막았고, 동독 요원들조차 ‘폭발 직전의 상황’이라 상부에 보고하고 있다는 서독 BND의 급전이 올라왔다.

동독 당국이 인의 장벽으로 에워싼 채 열차에서 내리는 브란트 일행을 맞이하고 회담 장소로 안내하자, 역에서 브란트를 보지 못한 4~5천 명의 군중들은 호텔로 향했다. 그중 약 1천 명의 공산당원들이 브란트를 야유하는 소리를 질렀다.

브란트가 슈토프와 함께 호텔 앞에 내려 30미터를 걸어 입구로 가는 순간 모든 저지선이 무너졌다. 서독 BND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열화와 같은 환호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TV방송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브란트 얼굴이 순간 잡혔으나, 브란트는 동독 당국의 안내로 호텔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열망하고 기다렸던가, 그냥 포기하고 넘어갈 동독 주민들이 아니었다. 브란트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군중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빌리 브란트 창문으로(Willy Brandt ans Fenster)”.

정확히 9시 45분 브란트가 2층 창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빌리, 빌리, 빌리 ...” 동독 주민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빌리 슈토프를 외치는 함성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동독 공산당이 군중들 사이에 심어놓은 요원들도 얼어붙어 넋을 잃고 상황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뉴욕타임즈>는 이 순간을 “그것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독일의 모든 지역 독일인에게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란 외침이었다”라고 타진했다.

브란트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동독 동포들을 바라만 보며 가슴에 담았다. 그럼에도 동독 주민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1970년 3월 19일 1차 동서독 정상회담 당시 그리고 통일 직후인 1990년 11월 17일 에르푸르트 호텔 2층 창문에 선 빌리 브란트 [사진=Archiv-Gross·Uwe Gerig·Doku-Liebe]
1970년 3월 19일 1차 동서독 정상회담 당시 그리고 통일 직후인 1990년 11월 17일 에르푸르트 호텔 2층 창문에 선 빌리 브란트 [사진=Archiv-Gross·Uwe Gerig·Doku-Liebe]

2년 뒤 ‘기본조약’이 체결됐고, 정권이 바뀌고 보수정부에서 더욱 활성화된 양 독일 간 교류협력의 초석을 닦았다. 동독 주민들의 삶과 인권이 개선되어 상호 방문과 이주, 서신·선물 교환, 라디오·TV 청취·시청이 가능해졌다.

정상회담이 시작되자 동독 주민들의 환호 목소리는 곧 사라졌다. 동독 보안인력들이 군중들을 몰아서 뿔뿔이 흩어지게 했고, 호텔 앞 광장은 인민군과 선발된 인력에 의해 통제되었다. 광장에 갑자기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나 소리 높이 “슈토프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기 시작했다.

체포가 곧 시작되어 이날 오후까지에만 약 30명이 체포되었고, 저녁에는 100명을 넘어섰다. 비밀경찰 ‘슈타지(Stasi)’는 환호를 보낸 사람들을 색출하기 위해 그들이 촬영한 것뿐만 아니라 서방 언론의 사진과 영상을 이용했다.

정상회담 후 책임 문제가 불거졌다. 42개 국가로부터 500여 명의 언론·방송이 집결한 카메라 앞에서 브란트에 대해 동독 주민의 환호가 터져 나온 상황을 전 세계에 보여준 것은 동독 공산당에게는 그야말로 수치였다.

동독 공산당이 직면한 또 하나 커다란 문제는 브란트에 환성을 지른 사태를 동독 주민과 당원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였다. 동독 대중 매체들이 이 우발적 사태를 보도하진 않았지만, 이미 상황은 서방 TV·라디오들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누군가 책임을 지거나,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다.

정상회담 당일 저녁, 에르푸르트 동독 공산당 책임자는 중앙당에 브란트에 대한 ‘환호시위(Beifallskundgebungen)’ 주동자가 서방의 언론인들이다, 그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군중들 가운데 당에 적대적인 사람들과 합작한 것이다, 지역당은 그런 아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도발에 대해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계획에 반해 서독 수상에게 환영을 보인 도발자인 서방 언론인들과 군중으로 위장한 적대적 분자들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브란트가 서독으로 돌아간 후 에르푸르트 공산당 제1서기, 슈토프 총리, 울브리히트 당서기와 그의 정치적 라이벌 호네커 간 책임소재 관련 언쟁이 있었다. 군중들이 브란트를 환호한 것은 호네커가 정상회담 개최를 반대했음에도 밀어붙인 울브리히트에게는 패배를 의미했다. 울브리히트는 에르푸르트 공산당에 책임을 묻고자 했고, 슈타지 책임자에게도 화살을 돌리고 비판과 자아비판이 이어졌으며, 한 공산당 중앙위원이 “우리는 패배했다”고 말했다고 서독 BND가 보고했다.

결국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울브리히트가 실각했고, 반대했던 호네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새로운 더 강퍅한 독재정권의 시작이었다.

2018년 9월 19일 평양 능라도경기장, 자칭 ‘남쪽 대통령’ 문재인은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 여러분의 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께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라고 격정의 연설을 했다. 북한 주민에게 감동을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동 받았다.

2024년 3월 현재, 문재인의 감동은 여전할 것이나 북한 주민의 삶도 여전히 고통스럽다.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통일 직후인 1990년 11월 17일 브란트는 에르푸르트 호텔 창문에 다시 섰다. “(20년 전) 에르푸르트 그날, 내 인생에서 나보다 더 감정이 격했던 사람이 있을까요?”라고 회고했다.

현재 그 호텔 지붕에는 ‘Willy Brandt ans Fenster’란 기념판이 세워져있다. 벽면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다음날인 1989년 11월 10일 브란트가 행한 연설 “함께 속한 것(민족)이 이제 함께 자란다(Jetzt wächst zusammen, was zusammen gehört)”가 새겨져있다. 앞 광장의 이름은 ‘빌리 브란트’다.

<세상을 보는 바른 눈 '뉴스퀘스트'>

※ 해당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