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호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이지만 전문어(專門語)의 혼란은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큰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애초에 말이 생길 때 전문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각자 적당한 용어(用語, 전문어의 다른 말)로 부르다가 차차 사회적인 통합이나 통일을 거쳐 전문어로 공식화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다. 동일한 현상이나 행위를 두고 몇 가지 전문어가 함께 쓰이는 것도 흔한 일이다. 오늘날 여러 분야의 발전과 변화는 실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빠르다. 이 과정에서 용어들이 속출하는데, 예술분야, 범위를 좁혀 공연예술분야도 마찬가지다.
 
가령, 희곡작가라는 용어 속에는 시인, 소설가 같은 창조적인 문학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각본가, 대본가, 각색자, 스크립터(scripter) 같은 용어에서 ‘어쩐지’ 창조적인 문학가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인 진실이라 할 수 없다. ‘창조성이 있고 없고’ ‘창조성이 진하고 약하고’는 본격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지, 사회 통념적으로 형성된 용어만으로 희곡작가보다 대본가는 비전문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까닭이다.
 
통념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특히 ‘그릇된 통념’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전문어의 사용이 이런 경우에 필요하다. 하나의 대안으로서 이런 전문가들을 극작가로 통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하는 일을 세분해 용어화(用語化)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지만, 그 용어의 의미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어떤 차별성까지 느껴지는 통념화의 단계에 이르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은 그런 현상을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공식용어(공용어, 공식어)를 제정하는 일을 마땅히 해야 한다.

국립국어연구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희곡’(戱曲)은 ①공연을 목적으로 하는 연극의 대본, ②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대화를 기본 수단으로 하여 표현하는 예술 작품, 드라마와 같은 의미로 정의되었다. 또한 ‘시나리오’를 참고하라고 했다. ‘희곡작가’는 ‘극작가’를 참고하라고 했다.
 
그런데 ‘극작가’는 연극의 각본은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앞서 ①에 국한했고, ②에서 지적한 보편성에 주목하지 않았다. 즉 극작가는 오늘날 무대 연극만이 아니라 무용, 영화, 라디오 드라마, 텔레비전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선, 다큐멘터리, 퍼포먼스 등의 대본을 쓰는 사람에게 두루 통용되는데, 이런 점을 누락시킨 것이다.
 
다시 ‘극’(劇)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작가의 개입이 없이 등장인물들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진 예술 작품을 이르는 말이라 했다. 예술의 양식적 차이에 치중한 개념 정의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극적’(劇的)은 ①극의 특성을 띤, 또는 그런 것(극적 분위기, 극적 갈등, 극적 요소, 극적 효과, 극적인 아이러니 수법, 극적인 어투), ②극을 보는 것처럼 큰 긴장이나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또는 그런 것으로 정의했다.
 
‘대본’(臺本)은 ①연극의 상연이나 영화 제작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글, 즉 상연대본, ②어떤 일을 하는 데 토대가 되는 책이라 정의했다. ‘각본’(脚本)은 ①연극이나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쓴 글. 배우의 동작이나 대사, 무대장치 따위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즉 극본, ②계획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했다. ‘각본가’는 연극이나 영화의 대본을 쓰는 사람으로서, ‘각색가’(脚色家)를 참고하라고 했다. 다시 ‘각색가’를 찾아 보면, 서사시나 소설 따위의 문학 작품을 희곡이나 시나리오로 고쳐 쓰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 정의했다. 각색가를 시나리오에 국한시킨 것이 서술의 한계이다.  국내에서 각색을 윤색(潤色)으로 잘못 사용하는 사례도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시나리오’는 ①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쓴 각본. 장면이나 그 순서, 배우의 행동이나 대사 따위를 상세하게 표현한다. 즉 영화각본, ②어떤 사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상적인 결과나 그 구체적인 과정이라고 했다. 시나리오 문학, 시나리오 작가를 예로 들었다. ‘드라마’는 ①희곡, ②텔레비전 따위에서 방송되는 극, ③극적인 사건이나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극’ ‘연극’으로 순화한다고 했다. ‘드라마투르기’는 희곡의 짓는 법. 오늘날에는 연극론, 연극술, 연출법, 극평을 이르기도 한다고 했다.
 
‘무용’에서 무용대본은 누락되었다. ‘만화’에서는 극적인 요소를 기록하는 것을 누락했고, ‘애니메이션’에서는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애니메이터’라고 해서 작화가(作畵家)를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라디오 및 텔레비전 드라마를 ‘방송극’ ‘방송드라마’로 통칭하고, ‘방송극본’ ‘방송무대극’을 기록했지만 방송작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범칭 ‘방송인’이 있을 뿐이다. ‘다큐드라마’ ‘다큐멘터리영화’를 기록했지만 작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상은 초판(初版)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15년이 경과한 현재, 국립국어연구원의 제반 역량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전문분야의 어휘기록에 대한 비전문적 한계와 시대에 뒤떨어진 어휘의 누락을 일단 지적해 두고자 한다. 

말은 역사적인 산물이고 시대에 따라 의미가 변하기 일쑤이다. 어디까지나 현대인이 사용하는 말이 ‘살아있는 언어’이고 그 언어를 유통시키는 것은 언중(言衆)이다. 어느 개인이 어휘를 만들었다고 해도 언중이 사용하지 않으면 그 어휘는 소외되거나 소멸된다. 개인(왕, 귀족)이 공용어를 만들어 일률적으로 사용하던 전제적(專制的)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지금은 학술적, 사회적, 국제적 필요에 따라 전문가집단별로 공식어를 선택해 일반인들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소통의 기능과 효과를 높이는 길이다.
 
앞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보았듯이, 공연예술에 관한 국어의 어휘들은 혼류(混流)가 많고 의미에 퇴영(退?)된 느낌이 짙다. 낡은 어휘들을 이리저리 뒤섞어 쓰고 있는 현상이다. 사전(辭典)이 가장 빠르게 변해가는 공연예술의 개념들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이 사전은 20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용어들마저도 수록하지 못한 느림보 사전이다. 이것은 사전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공연예술 개념의 현주소를 그대로 말해준다.
 
우리 연극인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말로는 ‘예술의 선진국’을 외치면서 아직 우리에게는 변변한 『한국연극사전』『한국예술사전』한 권 없다. 연극학자가 할 일이다, 연극학과가 있는 대학이 할 일이다, 출판사가 할 일이다 하면서, 모두 책임을 떠넘기고는 그만이다. 전통연희의 잠재력을 자랑하면 무엇할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전이 없지 않은가. 근대극 백년을 헤아리면 무엇할까. 작가나 작품을 확인할 수 있는 사전이 없지 않은가. 이런 사업은 한국연극협회가 전국의 모든 연극인이나 드라마 종사자들을 위해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 생각한다. 십여 년의 계획을 세우고 천천히 실현해야 할 것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는 연희학과(演戱學科)가 있다. 우리 전통공연예술을 지난날 연희라고 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전통이 현대 작품을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대공연예술을 ‘현대연희’라고 하기에는 서구적인 영향력이 지나칠 정도로 여전히 강하다. 서양의 ‘퍼포먼스’와 ‘퍼포밍 아츠’의 현실을 고려해 보면, 우리 ‘현대연희’의 실정이나 수준을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모든 공연예술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극적 요소, 또는 극적인 구조를 지닌다. 공연예술이 사람들에게 긴장과 집중과 흥미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런 극적인 요소와 극적인 구조 때문이다. 극적인 구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공연예술 표현을 위한 하나의 자율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극적인 구성은 현재까지 인간이 발견한 전달방법 가운데서 사회적으로, 예술적으로, 직접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필자는 이상에서 살펴 본 여러 가지 용어들을 바탕으로 우선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우리 국어로서 보편성이 있는 극작가, 극본, 극형식, 극양식, 극원리, 극이론, 공연예술 등을 공식어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공식어를 희곡과 연극만이 아니라 무용, 영화, 라디오 드라마, 텔레비전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선, 다큐멘터리, 퍼포먼스 등에 공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이런 양식들이 극적인 요소 및 극적인 구조를 본질로 하는 매체임을 기호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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