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할 전쟁마무리 노력

권태오 예비역 육군 중장

【뉴스퀘스트=권태오 예비역 육군 중장】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이기에 앞서 6.25전쟁 때의 유엔참전용사를 기리는 ‘국제 추모의 날’이다.

올해로 15회 째를 맞이하는 이 날이 되면 오전 11시 11분에 맞춰 전 세계 추모객들은 대한민국 부산에 위치한 유엔 기념공원을 향하여 1분간의 묵념을 한다.

유엔 기념공원에는 유엔 총회를 통해 유엔에서 영구히 관리하기로 결의한(결의문 제977호) 전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가 있다.

6.25 전쟁에는 전 세계에서 22개국이 참전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은 직접 전투 병력을 파병하였고 기타 국가는 의료지원단 등을 파견하여 우리를 도왔다.

그런데 사실 참전 국가 수로 본다면 두 개 국가가 추가되어야 한다. 올림픽 게임에도 가끔 조국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출전하는 선수가 있듯이 6.25 전쟁에서도 자기 나라의 이름을 올리지 못한 참전 용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조국은 자유중국(대만)과 일본이다. 1949년 중국 본토를 모택동에게 내어주고 대만으로 이동한 장개석 정부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확전을 우려하는 국제적 여론으로 인해 공식적인 참전은 불가능하였다. 이에 자유중국 정부는 일부 장교를 파견하여 한국 내 화교를 모아, 이들을 훈련시키고 특수작전을 담당하게 하였다.

총 2백 명이 교동도를 거점으로 HID(인간정보부대) 활동을 하였는데 1953년 9월 이 부대가 해체됐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20여 명 뿐이었다.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것은 알아도 이렇게 국내 거주 화교와 자유중국 군이 우리를 도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화교 희생자 중에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된 분이 두 분 있는데 그 중 한 분인 위서방(魏緖舫)은 전쟁 발발 전부터 이미 평양 장산탄광의 광부 780 명을 모아 북한군에 대한 유격전을 하였고 이후 화교 47명을 대동하여 특별수색대를 구성하고 1사단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한국말과 중국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알았기에 특수작전에 주로 활용되었다.

1950년 12월 24일 고랑포에서 중공군 포로를 생포함으로써 중공군이 이미 38선도 돌파하였음을 국제사회에 알렸고, 서울 탈환작전 때는 은밀 침투하여 벌써 중공군이 서울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유엔군의 서울 재탈환작전을 견인하였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외국인이란 이유로 우리 정부로부터 수당은 물론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제2의 조국을 위해 희생한 것에 비해서는 너무나 초라한 대접이었다.

두 번째 국가는 일본이다.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정상 국가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던 때였다.

전쟁 초기 유엔군이 투입되기 시작하자 소련은 북한에 4천개의 기뢰를 보냈고 이 기뢰들은 원산과 진남포, 해주, 인천, 군산, 목포 항 등에 부설되었다.

이어서 미군 구축함, 소해정 등이 침몰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의 미 군정사령부에서는 일본 해역에서 운용되고 있던 일본인 민간 소해대를 한반도에 파견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해군으로 복무하던 자들로써 소해의 베테랑들이었다. 소해정 46척, 시항선 1척, 승무원 1200명으로 구성된 소해대는 1950년 10월 초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원산, 인천, 진남포, 군산 지역 소해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327Km의 병참선과 607평방Km 구역을 소해하고 27개의 기뢰를 처리하며 원산상륙작전, 진남포 철수작전 등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원산 앞바다에서 소해정 1척이 기뢰에 의해 폭파되면서 1명이 사망하고 18명이 중경상을 입는 피해를 받기도 하였다.

이들 중국인 화교들과 일본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서울 탈환작전은 더욱 늦어졌고 흥남철수작전은 원활하게 시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종전을 논하는 지금,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자체의 전쟁 마무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뒤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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