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성주 대산리 한개마을 왕버들은 성주이씨 집성촌을 지키는 두 그루의 노거수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125, 성주 한개마을 민속촌 오른쪽 입구에 거대한 왕버들 두 그루가 바로 서고 누운 채로 숲을 이루고 있다.

워낙 유명한 성주 성밖숲(성주읍 경산리 성주읍성 밖에 조성된 55그루의 왕버들 숲)에 가려져 큰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대산리 성주 한개마을의 왕버들 두 그루 또한 수령 400년, 나무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6.7m 정도의 거대한 노거수이다.

중심 줄기는 바로 서 있으나 연륜을 말해주는 듯 큰 가지가 바닥으로 누웠다가 위로 솟구치는 수형이다.

성산 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인 대산1리 한개마을을 지켜온 노거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 왕버들 바로 앞에 ‘한개’라는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자연석과 보호수 지정 표지석이 서 있다.

성주 한개마을은 중요문화재 제255호로 국가지정 민속 마을이다.

전국에 국가지정 민속 마을은 7곳으로 성주 한개마을을 비롯해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영주 무섬마을, 아산 외암민속마을, 제주 성읍민속마을, 고성 왕곡마을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마을들이다.

월항면 대산리(大山里)는 배산임수의 지세를 잘 갖춘 마을이다.

영취산(靈鷲山)이라는 큰 산이 배경이어서 대산리라 했으며, 대산1리인 한개마을은 마을 앞에 백천(白川)과 이천(伊川)이 합류하는 큰 내가 있다 하여 큰 개울, 큰 나루라는 뜻의 ‘한개(大浦)라 칭하였다고 한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성주 한개마을은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의 입향으로부터 시작되어 600여 년 가까이 내려온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을 빛나게 한 인물은 이원조의 증조할아버지인 북비(北扉) 이석문(李碩文:1713~1773)이다.

1762년(영조 38)에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자,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영조에게 직언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해 고향 성주로 낙향했다.

당시 이석문은 사도세자의 호위무사였다. 큰 궤 속에 사도세자를 가둔 영조가 이석문에게 “큰 돌을 위에 올려놓거라” 하고 명했다.

이석문은 머리를 조아린 채 울면서 “죽더라도 감히 못 하겠나이다” 하고 읍소했다.

임금이 거듭 다그쳤으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자 영조가 급히 끌어내리라 명했다.

이튿날 이석문은 곤장 50대를 맞고 파직됐으며, 49세에 낙향한 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벽에 적어놓고 문을 닫아걸었다.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이라는 뜻의 ‘무괴심(無愧心)’ 세 글자로 자신을 다스렸던 그는 노론(老論) 인사들이 그 집 앞을 지나가자 남쪽으로 나 있던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날마다 북쪽 사립문에 북향재배(北向再拜)의 큰절을 올리며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때부터 ‘북비(北扉)’는 이석문의 충절과 지조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북비 현판‘과 함께 고종이 이석문을 추증하면서 내린 것이 ‘추증교지’와 ‘치제문(致祭文)’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한개마을 성산 이씨 집안은 이석문 이후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두 아들이 양자로 나가고 양자로 들어와 두 집의 가계를 계승하였다.

이원조도 큰 집의 대를 잇기 위해 이규진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할아버지 이민겸(李敏謙:1736~1807)의 엄격한 자손 교육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스승이자 제자가 되어 학문에 힘썼다.

그리하여 아버지 이규진(李奎鎭:1763~1822)에 이어 이원조도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것은 할아버지가 밤낮으로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회초리를 칠 때 올려세운 경침(警枕) 덕이며, ‘대대로 책 읽는 씨앗이 되어라’라는 ‘독서종자(讀書種子)’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였다. 

이원조는 1809년(순조 9)에 18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 등의 내직과 제주 목사 등 외직을 두루 거쳤고, 만년에는 주로 가야산 만귀정(晩歸亭)에 머무르면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그는 아들에게 바라는 바를 쓴 ‘시아첩(視兒帖)’과 침병(寢屛) 등을 만들어 자자손손 전승되는 ‘응와종택의 가법’으로 삼게 하였다.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가족 간의 교육을 통해 집안 대대로의 학문(家學)을 전승하여 당대에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드러냈고, 생가 조카인 이진상(李震相:1818~1886)과 종손자인 이승희(李承熙:1847~1916)는 ‘한주학파(寒洲學派)’로 당대의 일가를 이루었다.

성주 대산리 한개마을 왕버들은 성주이씨 집성촌을 지키면서 오늘도 묵묵히 서 있다.

<성주 대산리 한개마을 왕버들>

·보호수 지정 번호 11-18-04
·보호수 지정 일자 2011. 7. 28.
·나무 종류 왕버들
·나이 400년
·나무 높이 15m
·둘레 6.7m
·소재지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125 성주 한개마을
·위도 35.927532, 경도 128.326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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