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성주 어은리 왕버들은 삼정승을 지낸 이직이 귀향할 때 심은 지팡이가 자란 나무로 추정되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노거수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성주 어은리 왕버들은 성주군 금수면 어은리 394-2, 적산지(積山池) 아래 사이좋게 서 있는 수령 300년의 두 그루 노거수이다.

이 왕버들에 대한 전설은 구체적이지 않고 너무 간단하다.

‘시대 및 연대와 관직 미상의 이적이라는 교관이 마을 뒤 적산으로 수양 차 귀향할 때였다. 이적이 마을에 도달할 때 이 마을에는 정자목이 없음을 한탄하여, 귀향길에 짚고 온 지팡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의 전부이다.

쉽게 더 줄이면 어은리 왕버들은 ‘교관 이적이 귀향할 때 심은 지팡이’ 정도가 된다.

그런데 ‘교관 이적’이라는 전설 속의 인물에 대해 그 어떤 정보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어은1리의 마을 이름인 적산(積山)의 유래를 찾아보면 전설 속의 이적이 실존 인물 이직(李稷)으로 추론할 수 있다.

적산마을은 600여 년 전에 삼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모두 지낸 정승)을 지낸 성주이씨 이직(李稷:1362~1431)이 개척한 마을인데, 산이 첩첩이 쌓여 적산이라 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이직은 1426년(세종 8)에 관직을 사직하고 1427년에 하향하였다.

그러니까 성주 어은리 왕버들에 등장하는 전설의 주인공은 교관 ‘이적’이 아니라 삼정승을 지낸 실존인물 ‘이직’이었다.

이직이 만년에 성주로 귀향하여 세거하던 고택이 적산마을에 있었는데, 이직이 살던 이 고택에 학조라는 명승(名僧)이 개축하여 기거하면서 적산사(積山寺)라는 절을 세웠다.

그 후 200여 년 뒤인 임진왜란 때 이 절에 있던 찬희(贊熙)라는 스님이 왜병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해서 절을 폐하였다는데 현재는 절터만 남아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직이 충녕대군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1422년까지 성주에 안치된 적이 있으며, 만년에 성주군 선남면 명포리 송포마을로 하향하여 여생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600년 전에 어은리 적산마을에 들어온 이직의 행적과 이 왕버들의 가슴높이 둘레가 무려 8.1m라는 사실만 따져보아도 이 노거수의 수령은 300년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히 600여 년의 전설을 간직한 왕버들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세종 때 삼정승을 지낸 이직의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저서로는 '형재시집'이 남아있다.

특히 이직은 조선 개국에 참여한 고려 유신으로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유명한 시조를 남겼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쏘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은 고려 말의 유명한 권문세족 출신으로 증조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이다.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 아버지는 이인민(李仁敏)이다.

그의 큰아버지는 공민왕 연간(1351~1374)의 명신이었던 이인복과 우왕 연간(1374~1388)의 권신이었던 이인임이다.

하륜은 그의 사촌 누나의 남편인데 곧 종자형(從姉兄)이다.

이직의 장녀는 태종의 후궁인 신순궁주(愼順宮主) 이씨이고, 다른 딸은 태종의 처남인 민무휼에게 시집갔다.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 추대에 참여해 지신사(知申事)로서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1405년(태종 5년) 육조(六曹)의 편제가 처음 정해지며 최초의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414년 우의정에 제수되어 진하사(進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희(黃喜)와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다.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 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사직하였다.

성주의 안봉서원(安峰書院)에 제향되었고, 후손들이 추모하여 송포마을에 침곡재(砧谷齋)를 세웠다.

<성주 어은리 왕버들>

·보호수 지정 번호 11-21-3
·보호수 지정 일자 1982. 10. 26.
·나무 종류 왕버들
·나이 300년
·나무 높이 12m
·둘레 3.2m
·소재지 성주군 금수면 어은리 394-2
·위도 35.928878, 경도 128.18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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