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성주 자산리 은행나무는 조선시대의 학자 이순(李淳)이 어릴 때 심은 나무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532번지, 자산2리 마을인 귀령골에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은행나무는 공손수(公孫樹), 행자목(杏子木)이라 하며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릴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다른 자웅이주(雌雄異株)이며 바람에 의해서 수정하는 풍매화(風媒花)이다.

성주 자산리 은행나무는 마을 대숲 옆에서 엄청난 크기의 노익장을 뽐내고 있는데, 가을에 은행이 열리지 않는 수나무이다. 

'성주군지'에 따르면 조선 중기의 학자 야로(野老) 이순(李舜:1530~1606)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그가 어릴 때 심은 은행나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의 사돈인 고령 현감 이수일(李守一:1554~1632)이 피란을 온 마을이라고 해서 이 자산리를 고령동(高靈洞), 귀령골(貴靈谷), 귀렁골(靈洞)로 불렀다고 한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그런데 야로 이순이 어릴 때 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했으니, 기록상 그의 생몰연대를 따져보면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600년이 아니라 500여 년 정도로 보인다.

이순의 사돈인 이수일의 벼슬도 ‘고령 현감’이 아니라 성주 목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중요성을 고려한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요청으로 이수일은 성주 목사가 되었다.

대구의 김응서, 밀양의 이영과 협력하여 왜군에 대항하였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杖刑)에 처해지며 종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수일은 1597년 정유재란 무렵에 자산리로 피란을 온 것으로 보이는데, 1616년에 성주가 잠시 고령현에 합속된 적이 있으니 그 이전의 벼슬인 성주 목사를 후대에 고령 현감이라 불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순의 본관은 철성(고성), 자는 자진(子眞), 호는 야로(野老)이다.

아버지는 참판 이언명(李彦明)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승지 박훈(朴薰)의 딸이다.

일찍이 조선 성리학의 거두인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등과 도의(道義)로 교우관계를 맺었다.

일찍이 보우(普雨)의 인심혹란(人心惑亂)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580년 어사 송언신(宋言愼)의 천거로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0년 뒤 다시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소모장(召募將)으로 의병을 모집해 왜적들과 싸웠다.

만년에는 견곡촌(堅谷村)에 별장을 짓고 둔세(遯世)의 뜻을 지켰다.

성주의 유계서원(柳溪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1934년에 후손 이창화(李昶和) 등이 시가와 산문을 편집하여 성주에서 간행한 '야로당일집(野老堂逸集)'이 있다.

한편 이순의 사돈인 이수일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으나 예천·용궁에서 패전하였다.

다음 해 밀양 부사로 승진, 이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고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 뒤 회령 부사에 이어 1597년 나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곧 북도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성주 자산리 은행나무>

·보호수 지정 번호 11-2-43
·보호수 지정 일자 1982. 10. 26.
·나무 종류 은행나무
·나이 600년
·나무 높이 20m
·둘레 7.5m
·소재지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532
·위도 35.975852, 경도 128.20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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